여행을 하다보면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도시에서 놀랄만한 경관이나 유적을 만날 때가 종종 있다. 여행자로서 그 쾌감만큼 짜릿한 것은 없다. 이베리아반도에는 그런 쾌감을 선사하는 도시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세고비아에서 만난 로마 수도교나 신데렐라 성이 그러하고, 론다(Ronda)의 계곡, 몬세라트(Montserrat)의 수도원 등이 그러하다. 물론 세간에 널리 알려진 도시가 아니더라도 도시마다 경탄할 만큼 독특한 도시경관과 유산을 보여주는 사례가 많다.살라망카(Salamanca)도 그런 쾌감을 주는 도시 중 하나다. 세고비아에서 서쪽으
세고비아(Segovia)는 스페인의 중북부 레온(Leon) 자치주에 속한 소도시다. 마드리드에서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하는 순례길의 경유지이기도 하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인들이 정착했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서고트 왕국의 기독교인들이 정착했다. 7세기에는 이슬람인들이 진출했으나, 레콘키스타(재정복 운동)로 11세기부터 기독교인들이 재정착했다. 세고비아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양모와 직물 산업이 번창하면서 섬유 무역의 중심지로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오늘날에는 비록 지방의 소도시로 전락했으나, 보물같은 세계적 역사 유산을 3개
북아프리카를 휩쓸고 대서양까지 진출한 이슬람군은 거침없이 지브로올터 해협을 건넜다. 7세기 중반 아라비아 반도를 떠난지 불과 몇 십년 만의 일이다.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한 그들은 파죽지세로 서고트 인들을 몰아내며 북진했다. 기독교인들이었던 서고트족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지역으로 패퇴해야 했다. 바야흐로 유럽 대륙이 이슬람 세력의 수중으로 넘어갈 역사적 전환기였다.기세등등하게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 땅까지 쳐들어갔던 이슬람군은 뜻밖에 732년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샤를마뉴 대제에게 패하며 밀리기 시작했다. 승기를 잡은 유럽의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면 이마에 뿔처럼 툭 튀어 나온 곶을 만난다. 건너편의 이베리아 반도가 선명하게 보일 만큼 가까운 곳이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가르는 좁은 해협이 만들어진다. 지브롤터 해협, 대서양과 지중해를 잇는 물길이며, 지중해의 서쪽 관문이다.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 마주 보고 있으니, 교통과 전략적 요충이 아닐 수 없다.일찍이 많은 민족들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쟁투를 벌였다. 이곳은 본래 사막의 유목민 베르베르 족이 살던 곳이다. 그러나 숱한 외부세력의 침탈 속에 주인이 수없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부터 출발한 이슬람군의 헤지라(Hejira; 聖戰)는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북아프리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들은 정복한 땅을 식민지로 삼고 이슬람 국가를 건설했다. 오늘날 동부 리비아에서부터, 튀니지, 그리고 서부 알제리에 이르는 땅을 그들은 이프리카야(Ifriqiya)라고 불렀다. 그리고 카이루안(Kairouan)을 그 중심 도시로 삼았다. 원래는 동로마제국의 요새가 있었던 곳인데, 이를 빼앗아 도시를 만들고 서북 아프리카로 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카이루안(Kairouan)은 튀니지에
로마에서 지중해를 건너 북아프리카의 튀니지로 향한다. 버킷 리스트에 깊숙이 감춰두었던 신비의 나라다. 미지의 여인을 만나는 것보다 더 설렌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북아프리카의 해안가 풍경은 타잔의 밀림도 아니고, 동물의 왕국에서 볼 수 있는 사바나의 초원도 아니다. 유럽의 지중해 연안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곳에 자리 잡았던 문명과 역사 또한 유럽이나 중동에 가깝다. 땅을 중심으로 문명을 이해하려는 선입견이 늘 문제다.역사적으로 보면 튀니지만큼 파란만장한 역사적 과정을 갖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카르타고와 로마
나일강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국경도시 아스완에 닿는다. 도시를 감싸고 흐르는 나일강이 호수처럼 넓고 위풍당당하다. 대형 크루즈가 드나들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고, 마리나에는 고급 요트들이 즐비하다. 돛을 활짝 편 펠루카(전통 돛단배)들도 떠다니지만 이국적 풍경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중해의 어떤 항구풍경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추리 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나일 살인사건’이 시작되는 무대로서도 손색이 없다.갈수기가 심한 이 지역에서 어떻게 저만큼 풍성한 강물이 유지될 수 있었을까. 풍성한 강물의 실체는 도시 외곽에서
기원전 2000년경부터 고대 이집트의 수도로 번영했던 테베(Thebe)는 오늘날 룩소르 근처에 소재했었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나일강의 서쪽과 동쪽을 각기 다른 세상으로 인식하면서 도시를 건설했다. 나일강의 서안이 네크로폴리스(necropolis) 즉 저승세계라면, 동안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승의 세계였다. 이에 무덤은 나일강 서안에, 도시는 나일강 동안에 조성됐다. 하지만 도시 유적들의 대부분은 소멸되어 사라졌고, 신전 건축만이 남아 위대했던 이집트 문명의 역사와 건축을 증거하고 있다.고대 이집트 인들은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다양
카이로를 떠나 룩소르(Luxor)로 향한다. 기차는 나일강을 따라 밤새 남쪽으로 달린다. 아침 햇살에 밝아오는 차창 밖으로 나일강이 따라온다. 사막을 달리던 풍경은 강을 만나며 싱그런 녹색의 수채화로 바뀐다. 강변에는 사탕수수, 밀, 과일, 채소, 야자수 등 짙은 녹색의 생명력이 사막과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강 양편에 펼쳐진 농지 폭이 1~2㎞ 정도에 불과하지만, 나일 강의 길이를 생각하면 광대한 오아시스다. 고대 이집트 문명을 잉태하고 양육한 문전옥답임에 틀림이 없다.밤새 660㎞를 달려 온 기차는 아침 무렵 룩소르에 닿는다.
아프리카의 중부내륙 빅토리아에서 발원한 거대한 강물은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을 건너질러 북으로 향하다가 지중해에 닿는다. 나일강, 6700㎞에 이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다. 나일강을 따라 사막을 적신 강물은 하구에 이르러 강물에 실려 온 충적토를 쌓아 거대한 삼각주를 만들었다. 비옥한 농토에서는 엄청난 농업생산이 이루어져 잉여 생산물이 쌓이고, 이는 나일 문명의 기반이 되었다. 무려 1 만년 전의 일이다.고대 이집트 인들은 나일강 주변에 도시를 건설하고 세력을 넓혀 갔다. 강은 필수적인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를 제공했고, 수
와디 무사는 페트라로 들어서는 관문이다. 바가지 입장료를 받으면서도 호객꾼들 극성이 시장판을 방불케 한다. 들어가는 길은 내리막길이라 걷기가 수월하다. 변화하는 풍경과 간간이 나타나는 유적을 구경하는 데는 걷는 속도가 더 유용하다. 입구에서 10여분 걸으면 협곡이 시작된다. 모래가 깔린 길바닥도 걷기에 편안하다. 기암 괴벽의 협곡 길(siq)이 끝없이 변화하는 공간감을 연출한다. 사막지대에 형성된 붉은 사암의 바위산, 와디럼에서 본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씻기고 깎여 경이로운 예술 조각품이 되었다. 그 길은 자연의 조각을
페트라가 대중적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 3- 최후의 성전 편에 등장하는 암벽 사원의 장면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그곳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사용한 성배를 감추어놓은 장소로 등장한다. 물론 허구의 상상력이지만 성물이 감추어진 신비로운 장소로서의 이미지는 공감을 얻을 만하다. 그 장소가 바로 요르단 안에 실재하는 고대 유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신비로움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후 페트라는 요르단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며, 최고의 관광자원으로 떼돈을 벌어들이고 있다.실상 페트라에는 암벽 사원(알카즈네)만 있
예루살렘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한다. 당연히 예수 탄생지를 돌아보기 위함이다.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 땅이다. 그 땅에 들어가려면 콘크리트 분리 장벽을 넘어 삼엄한 경비초소를 거쳐야 한다. 외국도 아니지만 함부로 넘나들 수 없는 경계다. 잔뜩 긴장했지만 의외로 통과 절차는 까다롭지 않다. 관광객들에게는 너그러운 편인가 보다.높이가 5m에 이르는 콘크리트 장벽은 전기 철조망까지 갖추어 마치 교도소의 담장처럼 두 세계를 갈라놓았다.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이 장벽을 ‘보안장벽’이라 부른다.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장벽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루살렘은 성지다. 문제는 서로 다른 종교를 바탕으로 하는 여러 민족의 성지라는 점이다. 그 거룩한 땅을 지키기 위해, 또는 되찾기 위해 벌어진 갈등과 투쟁의 역사가 수천 년을 넘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히브리어로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예루샬라임(Yerushalyim)과도 거리가 멀다. 도대체 이 땅에 어떤 ‘거룩함’이 있기에 그토록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것일까.예루살렘성은 그 맞은 편 올리브동산에 올라서야 그 전모를 볼 수 있다. 돌산 경사면에 자리 잡은 도시와 성벽, 그리고 아침햇살에 빛나는 황
동서 문화의 교차로이며 용광로인 사마르 칸트. 이곳을 빼고 실크로드의 문명사를 논하기는 어렵다. 실크로드상의 도시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이 도시 또한 오아시스에서 기원한다. 자라프샨(Zarafshan)강을 터전으로 기원전 6세기부터 도시가 형성되었으니, 중앙아시아권에서는 연륜이 가장 오래된 도시라 할 것이다. 사통팔달의 요지에 자리했기에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종족들이 각축을 벌였다. 알렉산더, 징기스칸, 티무르 등 역사적인 전쟁영웅들이 모두 이곳을 거쳐 갔다.산스크리트어에서 ‘samarra’는 만나는 장소를 의미한다. 초원의 각
622년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는 박해를 피해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향했다. 헤지라(Hejira)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이슬람 정복 전쟁의 시작이었다. 페르시아로 진출한 아랍인들은 사산조 통치자들을 초원 멀리까지 쫓아내면서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이슬람 제국으로 편입된 민족들은 정복자의 종교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문명 변동에 직면해야 했다. 이는 종교와 정치, 교육과 학문, 상업과 문화에 걸친 사회적 대변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슬람 도시로서 새로운 도시적, 건축적 요구가 발생했다. 모스크와 이슬람 학교, 분묘, 교량,
부하라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페르시아 문명의 자취를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박물관이다. 이스파한(Esfahan)에서 동쪽을 향해 출발한 실크로드가 중앙아시아에 들어서면서 만나는 첫 번째 오아시스. 이란고원을 가로질러 키질쿰(Qyzylqum) 사막을 건너온 대상들은 신기루와 같은 오아시스를 만나 신께 감사하고 지친 여정에 안식을 얻었을 것이다. 부하라는 네 방향의 실크로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에서 계속 동진하면 초원지대를 건너 중국과 연결된다. 북쪽으로 향하면 카스피해와 아랄해 사이를 통과하여 러시아로 닿는다. 또한 남쪽으로
이란에서 동쪽으로 키질쿰 사막을 건너면 광활한 초원지대에 닿는다. 아무다리아와 시르다리아 강 사이에 쌓인 충적토가 만든 비옥한 초원이다. 옛날에는 옥수스(Oxus) 강이라 불렀던 아무다리아(Amu Darya)강의 서쪽에는 거대한 히바(Xiva) 오아시스 도시가 만들어졌다. 카라반들은 이 도시를 거점으로 삼아 인도를 향해, 혹은 중국을 향해 장삿길을 떠났다. 이란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거점도시로 번성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의 지방 도시에 불과하나, 기원전에는 페르시아인들이 만든 호라즘(
전설처럼 신비스러웠던 고대 페르시아의 문명도 중세에 이르러 서서히 그 빛을 잃고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게 된다. 우리의 고려시대가 그러했듯 이민족의 잦은 침략과 지배로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새로운 종교, 새로운 문명이 이 땅을 지배했다. 특히 7세기 이슬람의 확산은 이란을 오늘날까지 이슬람 문명권에 편입시키는 문명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 보면 이슬람 문명이 페르시아 땅에서 새로운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모스크는 이슬람 도시의 가장 핵심적인 시설이자 건축이었다. 모스크 건축은 사우디 메디나에 소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시 중심에는 광장을 두게 마련이다. 광장은 시민들이 모여 교류와 소통을 이루고 의식을 진행하는 사회적 공간이다. 그곳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독특한 사회체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아고라를 만들어 민주주의를 탄생시켰고, 로마제국의 포럼은 공화정의 산실이 되었다.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은 상업과 무역을 진흥시켰고,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은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성 도시의 상징이었다.이스파한의 중심에서도 놀랄 만큼 독특한 광장을 볼 수 있다. 바로 사파비 왕조 시기에 만들어진 이맘 광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