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전국대회서 준우승 차지하며울산 대표 씨름선수로 이름 올렸으나1958년 4대 총선에서 정 후보 지원하다상대후보측 일당에 턱 가격당해 큰 부상사건 진술할때 말 못해 글로 진술하기도경제적으로 어려움 겪던 울산 떠나강화도에서 여관 운영하며 여생 마쳐지난 주 울주민속박물관은 울주군 씨름대회 특별전을 열고 도영복·김영길·박두진·이종진 장군 등 그동안 명멸
1909년 울산 학성동 출신으로 해방후 체육회 회장 5회나 연임울산여중뒤 집없이 천막·토굴에서 생활하던 가난한 이웃 위해1958년 주택개량사업 벌여 30여채 건립 ‘함바마을’로 불리워져60년대초 중앙일보 지국장으로 삼성 관련 사업 지역유치에 앞장를 보면 큰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농추(濃秋) 박현호(朴鉉鎬)다. 울산체육회가 태동한 것은
진하 만석꾼 이규현의 손주로우석 이후락이 외 5촌 아저씨몸집이 크면서 과묵한 성격으로우석이 대통령 비서실장 됐을때부터최측근으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녀롯데를 새마을 운동에 참여시키고울산실내체육관 건립 기금 마련 등고향 울산의 발전에 힘보태친인척 인사청탁도 철저히 배제울산에는 이장우 중앙정보부 비서실장, 정택락 이후락 청와대비서실장 비서, 이동철 육영회 회장 등
각급 학교 건립 주도하고 기성회장 맡아 청소년 학업 후원책·학용품은 물론 실험기구 등도 제공…교사수급에도 열성향토장학제도 만들어 형편 어려운 학생 하숙비·학자금 지원지역 현안에도 관심 기울여 방파제 건설하고 마을금고 설립요즘은 동해의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강동의 정자가 울산 도심에서 30분 거리도 되지 않는다. 따라서 푸른 바다를 보면서 싱싱한
어릴적부터 당당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여성 선각자로해방후 동래여고 졸업, 악질형사 백인기와 함께 근무김재호 원장·김인갑씨 등 고문당할때 석방에 큰 도움남편 김도정 선생이 소년원장으로 가면서 경찰서 떠나울산경찰서는 설립 후 국가를 보위하고 울산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앞장서 왔지만 이 과정에서 시민들을 울리는 애환도 많았다. 울산지역에 최초의 신식 경
항도일보 기자로 첫 언론활동 시작논설위원으로 자유당 독재 비난도의원 출마, 자유당 탄압으로 낙선울산 보도연맹 발굴 전국에 알리고독립운동의 산실인 3·1회관도 복원언론인으로 정도 지키기 위해 노력울산 언론사(史)는 울산독립운동사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울산에서 기자협회가 만들어졌을 때 참여했던 동아일보 박병호, 조선일보 김기오, 시대일보 강철은 엄혹한 일
부산에서 태어나 전북 익산 오가며 생활백양사에서 고시공부하며 울산과 첫 인연1987년 변호사로 돌아와 노동계 무료변론노무현 정부때 국민고충처리위원장으로KTX울산역 설립 등 울산 위해 일했지만선거때마다 고향 문제가 쟁점이 돼 낙선지난 7월30일 치러진 울산 남을 재보선 결과에 대해 지역 언론은 ‘이변은 없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변이라는 것은 무소속의 송철
중리마을 김성도씨, 불편한 몸으로 농사지으며 살다가대현면 상계마을의 훈장 딸 김임출씨 신부로 맞게돼지혜로운 아내 덕분에 3남1녀 낳고 경제적으로도 여유1962년 1700평 규모의 부지 기증, 신리초등학교 건설회야댐에 마을 잠기면서 1996년 23회 졸업생으로 폐교울주군 청량면에 있는 회야댐 일대는 풍광이 좋고 특히 회야 정수장에서 석계 마을에 이르는 길은
이철응옹의 ‘울산체육 30년사’에 따르면故 이종하옹 체육관 건립 의사 밝히면서태화강 하류 대도섬 모래채취 허가 요구모래 채취 이득·손해 의견 엇갈리고체육관 건립 부지는 울산시유지로이옹은 관리권만 가졌다는 이야기도6월 10일자 경상일보에 ‘종하 체육관의 허명’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독자칼럼이 울산시민들 사이에 진실 게임으로 번지고 있다. 해당 글은 종하체육관이
울산은 보도연맹으로 죽은 사람의 집계가 800여명이 넘어 다른 지역에 비해 숫자가 많다.울산의 보도연맹 실체는 노무현 정권 때 만들어진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으로 어느 정도 파악 되었다.아쉬움은 그동안 보도연맹 실체가 언론을 통해 여러번 보도 되었지만 정작 무고한 주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가해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1932년 중구 성안동 출신으로울산농고 12회중 유일하게 육사 합격울산서 사이비 기자 척결·공공근로 추진투철한 군인 정신으로 공·사 엄격히 구분울주군수·포항제철 중역도 마다하고군인의 길 걷다 장군까지 올라5·16군사정부는 울산과 인연이 깊다. 울산은 5·16을 주도했던 박정희 장군에 의해 공업도시로 지정되었고 이후 급격한 발전을 했다. 그러나 울산 사람들
활달한 성격·아름다운 외모 갖춘데다아버지의 경제력이 사회활동 밑거름1970년대부터 제도권 단체 활동 시작처녀시절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결혼후 중구 성남동에 백초다방 운영정치인 자주 모여 여론의 중심지 역할60~70년대 울산사회의 특징은 여성단체가 많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복지를 위
유교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주기철 목사의 설교 듣고 기독교 개종1930년 울산제일교회의 교역자로 활동하며 울산에 첫발 내딛어왜경의 감시 벗어나려 오산대밭서 칩거하며 산상예배·애국운동해방후 재건국민운동 울산본부장으로…장남 성해씨도 청년운동지난해 울산 문화계 인사들이 순천 선암사를 여행한 적이 있다. 이때 이 행사를 준비했던 서진길 전 울산문화원장은
정부수립 전후 울산서 기자 활동‘동해지구 특파원’으로 큰 영향력마당발 부인 조화자씨가 후원자수리조합장으로 있으며 출세가도1970년초 녹동저수지 조성 관련세부담 증가로 농민 반발 사기도해방 후 울산 언론사를 연구하다 보면 자유당 시절 울산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특이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이종원씨다. 60년대와 70년대에는 울산농지개량조합장을 오래 해 기
1940년 동래고보·제2상업학교 학생들일본심판이 한국학생들 우승 막자애국가·아리랑 부르면서 거리시위日육군대좌 노다이의 관사 습격도동래고보 다니던 차재규 등 퇴학5학년이던 안장원은 옥고까지 치러차재규, 해방후 울산서 계몽운동 앞장6·25도 참전했지만 보훈자 명단선 빠져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다 보면 일제 말 부산에서 일어났던 유명한 ‘노다이(及
5·16이전만해도 울산은 야당도시전두환 정권 퇴진 6·10 항쟁 때도전국서 가장 치열한 민주화운동 벌여최 전 장관, 울산서 민주화운동 투신울산광역시 승격에도 일등공신 역할김재호 박사·김인갑 위원장 외에도김성렬 전의장·김문찬 교수와 인연 최형우 전 장관이 지난 17일 울산을 다녀갔다. 그가 울산에 온 것은 매년 울산에서 열리는 ‘울산민주화운동 동지회’ 모임에
양산 출신의 대지주…울산 이주한 뒤 민족운동 투신민우회 부회장·회장 맡아 지주 등급제 해법 내놓아농촌 문제점·현실 파악해 소작료 인하 등 대안 제시교육문제에도 관심…민선 경남도의원 활동 중 영면울산민우회는 일제강점기인 1927년 1월 당시 울산청년들이 벌이고 있는 민족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울산의 장년층이 중심이 되어 만든 사회단체였
울산 공업도시 지정 초창기 지역발전 저해한 인사 지칭‘3기7암’ 이라는 괴담 떠돌며 지역사회 분열 초래하기도박영출 전 문화원장·류승렬 전 교육위 부의장 등 거론실제론 울산발전 앞장섰던 이들로 시기심에 괴담 퍼뜨린듯최근에도 ‘문화 5적’ 등 괴담 기승…미성숙한 사회 반증 60년대 울산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던 ‘3기7암(三奇七癌)’의 망령이 50여
우석의 울산농고 동기로 농협 상무에서 지점장으로 고속승진이후 우석 연락사무소 소장직 맡으며 정·관·제계인사와 교류제2대 울산MBC 사장 역임하며 우석의 지방비서 역할 톡톡1980년대 전두환 정권 들어서 서빙고로 불려가 고초 겪기도60년대 중반 울산에 살았던 사람들 중 정택락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당시 울산 사람들은 정씨를 두고 “한강 이남에서
해방후 귀환동포 먹고 잘곳 없어 고생하자 사회사업 시작한국전쟁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불우아동돕기 재단 설립‘남을 돕고 받드는 주춧돌 되겠다’ 봉석(奉石)으로 개명달동 300평 YMCA에 기증…달동 강남교회 부지도 기증이옥주 여사의 내조·공무원 윤진백 장로의 지원도 큰 힘지난 4월 10일 울산YMCA가 북구 진장동에서 창립 40주년 행사를 갖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