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북 못안마을서 출생 언양초 졸업日유학 중 만주로 징병됐다가 탈영해방되자 몽양 아래서 건준위 활동몽양 암살 후 좌익 몰려 방랑생활1948년 귀향해 상북 길천초등 근무상북중 교감 거쳐 개성중 교장 퇴임현대문학 등단해 활발한 집필활동도지난해 말 상북중학교는 개교 60주년을 맞아 ‘면립학교 개교와 회생’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이 책에는 지난 60여년 동안 상북
60~70년대 설탕·밀가루 독점해 큰돈울산 전역서 사들인 토지·건물 상속연세대학 졸업했던 장남 종웅씨영어·일어 능하고 매우 똑똑했지만각종사업 실패·자선사업·보증으로유산 모두 날리고 병상에서 지내지난 달 천재 피아니스트 김희자씨와 관련된 내용의 글이 이 지면을 통해 보도되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남편 이종웅씨에 대한 안부를 물어왔다. 그는 현재 요양원
예로부터 장생포·방어진에 고래 많아일본인 독점하다 해방후 지역민도 포경50년대 본격화 60~70년대 전성기 맞아16세인 40년대 말부터 포경선 탔던장생포의 손남수씨, 그시절 포수로 활동서해의 어청도·흑산도서 고래 잡기도손씨의 이야기 토대로 스토리텔링구광렬 교수, 책 ‘반구대’ 발간 예정 울산은 극경회유해면이 천연기념물 126호로 지정될 정도로 옛날부터 고래
양산 출신으로 언양초 졸업 추정일찍이 일본서 유학생들과사회주의운동 ‘북성회’ 조직1923년 귀국후 농민운동 전개북풍회·자오회·신간회 등민족주의자로 사회운동 활발해방직후 적산가옥 책임자였던박두복씨 집에서 가족들과 기거월북설·보도연맹 사망설 분분일제강점기인 1926년 울산에 기자협회가 구성될 때 동아일보 박병호씨, 조선일보 김기오씨 그리고 시대일보 강철씨가 앞
의사 아버지 아래 5세부터 피아노 시작50년대 초반 이화콩쿠르에 입상해 유명백건우·윤이상 선생과도 어릴적 인연佛 국립고등음악원 입학 허가 받았지만청각상태 위중해 유학 포기하고연세음대 입학해 남편 이종웅씨 만나울산에 시집와 개인 피아노 레슨 시작전국대회 입상한 어린이들 많이 배출윤철희씨는 유명 음악가이자 교수로 성장(이후락씨 매형의 손자)지금은 한적하기 짝이
해방 전후해 중학교 체육교사로제일중 축구부 창설 하자마자전국대회서 두번이나 우승 쾌거초·중학교 사이에 축구붐 일기도中베이징 출신 ‘조빼낑’이라 불려1963년 울산축구협 초대이사 선임조씨 가족들 모두 운동선수아버지는 연식정구, 형은 테니스동생은 축구선수로 함께 뛰기도울산은 2002년 월드컵 축구 경기를 전후해 세계적인 축구 도시가 되었지만 이를 아는 사람들이
당대의 거부로 성남동 32번지에 거주고래등 같이 큰 기와집으로 유명해방후 화재로 소실 ‘울산 3대 화재’1927년 발대한 민우회의 위원대표로일제의 수리조합 창립 반대에 동참1933년엔 부회장에 선임되기도아들 손영두씨, 연식정구 국가대표로일본대회에 조선대표로 두번이나 우승해방후 한국정구연맹 임원으로 활동작은딸 정자씨, 김종환 전장관에 시집가해방을 전후해 울산
■ 뛰어난 언변1919년 병영청년회 창립 주도신간회·울산청년연맹도 조직정해영 의원 총선때 책사 활약日서 학부모대표로 연설하기도■ 미래를 보는 혜안해방후 우익의 최일선으로 활동그가 면장으로 있던 하상면에는보도연맹 관련 희생자 많지 않아죽기전에 5·16발생도 예견해방을 전후해 울산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시 울산의 대표적인 면장으로 최봉식, 박장집, 유창
1928년 방어진서 3여년간 목회울산·부산·밀양에 개척교회 건립후에 여수에서 나환자 돌봄 사역여순반란사건으로 두 아들 잃지만살인자를 양아들로 받아 사랑 실천일제강점 초기 신사참배 거부하던울산 목사들 모진 고문에 잇단 순교울산에 병영교회가 1895년에 최초로 세워진 것을 생각하면 울산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벌써 120여년이 된다. 울산선교사를 연구하다 보면
1918년 경성의전에 입학 ‘쿠보 망언 사건’ 동맹휴학 주도1924년 울산에서 울산의원 차리는 등 의료·교육활동 앞장1927년 신간회 울산지회장으로 사회운동 활성화의 구심점왜경의 압력으로 1931년부터 서울·만주·연변 등지서 활동신간회 울산지회는 일제강점기 울산을 대표하는 항일 단체였다. 이 때문에 신간회 울산지회는 일제의 반대로 창립자체가 어려웠고 창립
함양군 수동 출신 강분남 할머니1924년 울산에 이주…4대째 운영초기엔 기생들 고용해 술도 팔아50년대 제대로 된 식당 없던 울산에외식문화 선도, 유명인 많이 찾아신익희 선생,김종원 경찰국장에최근엔 욘사마 배용준도 발걸음유권자에 술과 밥 사는게 당연하던58년 4대 총선엔 선거사무실로 이용울산은 1960년대 공단으로 지정된 후 시민 소득이 높아져
박 원장, 1908년 북구 송정동 출생1930년 서울 세브란스 의대 입학해1940년대초 울산 내려와 학산동에600여평에 2층건물 지어 병원 운영울산군 보건과장·경찰공의 등 역임노래를 잘 부르는 등 예술가적 기질손자 박민규 소설가에 물려준 듯해방을 전후해 울산에는 양봉근과 안효식이 운영했던 울산의원과 강정택의 부인 이간원이 원장이었던 평화의원, 그리고 박인수
1928년 양조회사 1만원으로 설립해방후 차용규가 친일파로 몰리면서고기업이 울산양조장 맡아 운영1964년 지역양조장 합동주주로 통합지역 촉망되는 젊은이들 다수 고용태화호텔·모드니백화점의 김기수태화공업사 허철 등 지역경제인 배출해방을 전후해 울산을 대표하는 기업인을 들라면 난정(蘭庭) 고기업을 드는데 주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난정은 일제강점기에는 양조장과
해방후 울산대표 문인 이상숙 선생60년대 부친에 물려받은 해동여관의앞자리에 명다방 세워 문화공간 활용아래쪽 동아약국도 절로 유명해져70년대 초 최영근의원 따라 서울로제일생명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임해방 후 울산의 문단을 이끌었던 인물로 김태근과 이상숙 선생을 빼 놓을 수 없다. 이중 김태근은 울산에서 계속 활동해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상숙은 70년대 초
6·25때 피난왔던 서울 한의사 도운 인연으로 서울서 유학 4년간 한의사 집에서 공부하면서 어깨너머로 침술도 배워 뛰어난 침술에 경주·부산 등지서 환자 구름처럼 모여들어 1976년 한의대학 편입…1978년 정식 한의사로 울산 컴백 하루 200여 환자 돌보며 부 축적…아내는 사회환원 앞장 지난해 11월 안무원 안국한의원 원장이 향년
이후락의 인척으로 단번에 금배지 다는 행운 거머쥐어공업도시 지정 후 외부인사 방문 많아져 울산호텔 건립박정희대통령·장기영부총리 등 중앙의 실세 자주 이용김 의원 집터가 명당이라서 명예·부·인물 낳았다는 설울산은 다른 지역에 비해 선량이 되기가 힘들다. 우선 출마자가 많아 경쟁률이 높고 또 지금처럼 선거구역이 여럿 나누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선거구역이 넓어 유
1921년 동아·조선일보 언양지국장으로 있으면서 울산기자단·신간회 창립, 민족계몽운동에 팔걷어 일제에 저항 혹독한 고문으로 두다리 못쓰게됐지만 대한교과서 창립, 우리나라 문학사에 금자탑 세워 세종시 대한교과서박물관에 우석의 삶 고스란히 우석(愚石) 김기오(金琪午)는 일제강점기 울산이 낳은 큰 인물이다. 1900년 11월 8일 언양에서 태어났던 그는 일제강점
1977년 발간된 를 보면 우리들의 시선을 끄는 사진이 한 장 있다.1948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14회 올림픽’에 참가하는 축구왕 최성곤 선수를 환송하는 사진이다. 울산역전에서 열린 이 행사는 이미 사진을 통해 우리들에게 잘 알려졌다.그런데 이 사진에서 최성곤 선수 바로 옆에 정장을 한 채 두 손을 깍지 끼고 서 있는 50대 어른
이정신씨-울산 치과의 이규명의 딸로 양산 만석꾼에 시집갔다 다시 귀향 박연옥씨-축구왕 최성곤과 결혼, 시댁 있던 중구 북정동서 신혼생활 꾸려 신희자씨-의료인·정치인으로 활동한 김재호 박사의 아내로 내조에 힘써 셋 다 내로라하는 부호의 딸로 태어났지만 남편 명성뒤에 어려움 겪기도 일제 말기 전쟁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우리나라는 전쟁 물자를 징발당하고 청년들이
회원들 마찰에 “전우의식 되살려라” 호통숙박도 호텔 대신 참전용사 집·모텔 이용모범적 행동·검소한 생활 모두에게 귀감주월 사령관 재직시절 ‘부하사랑’ 남달라전투식량 납품 따내, 산업국가 터전 마련죽은 후에도 사병묘역에 묻혀 감동 전해지난주 채명신 장군이 운명했다. 채 장군은 초대 주월 사령관으로 전쟁 중 뛰어난 전략으로 한국군의 용맹을 대외적으로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