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후미진 참외 밭고랑에 누어놓고 간 똥덩이에서까맣게 마른 그 속에서 한차례 비 뿌리고 지나가자놀랍게도 여린 참외 싹 몇 개 내 돋는다그렇다면 막 껍질 벌어져 싹을 내밀고 있는 저 참외의 씨앗은매순간 무섭게 진행되어 가고 있는 그 부패의 힘?……얼핏 보면 희망 같기도 한나는 폐가를 보고 있다
한 구절씩 읽어 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허물어 버리는,그러나저 산을 억만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경전은 완성이 아니라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 있다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사랑이
아무리 못난 사람도화를 내거나 우는 사진은 없다서럽고 쓸쓸한 시를 쓰는 시인도시집 한구석에서 희미하게 웃고무정한 세상을 근심하는 노스님도지상(紙上)에서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어느 상가(喪家)에 가더라도 고인은 웃는다그의 여정이 즐거웠던지혹은 고달팠더라도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환하게 웃는다 -생략- 웃는다는 게
흰 구름이 자꾸만키를 높여가는하늘 아래염소 한 마리 고삐 매여풀을 뜯고 있는풀밭 위에살그머니 다가가몸을 눕혀본다마음도 눕혀본다나는 흰 구름을 바라보는데염소는 풀을 뜯다 말고나를 바라본다물끄러미서로. 김종삼의 묵화가 생각납니다. 가만히, 또는 물끄러미 라는 말이 참으로 그윽하기도 하고요.시집을 간행하고 “어쩌면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날이지 싶어서 그렇게 한
분꽃이 피었다내가 이 세상을사랑한 바 없이사랑을 받듯전혀 심은 바 없는데 분꽃은 뜰에 나와서저녁을 밝히고나에게 저녁을 이해시키고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의 이 세상을보여주는 건지,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왔다고 생각되는그 비애(悲哀)보다도 화사히분꽃은 피어서 꽃 속을 걸어 나오는 이 있다저물면서 오는 이 있다 하고많은
깃털처럼 가볍지만때론바위처럼 무겁단다시냇물처럼 즐겁지만얼음처럼 차갑기도 해들꽃 향기에도와르르 무너지지만천둥 번개에도꿈쩍하지 않아.순한 양이다가고삐 풀린 망아지처럼가끔 나를 쩔쩔매게하는 것.알지?조심조심잘 다스려야 해. 마음먹기에 달렸다.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일편단심(一片丹心).
13층 욱이 엄마는광고판만 보고12층 아저씨는휴대전화만 보고7층 누나는거울만 보고딩동 5층입니다.아줌마, 안녕하세요?아저씨, 안녕하세요?언니, 나 유치원 가여섯 살 민아가마음 문을딩동딩동 열고 들어옵니다. 안녕하세요? 이 인사말 한 마디, 어떨 땐 먼저 쉽게 나오질 않지요. 무뚝뚝한 표정이 어쩜 한국 사람들의 기질인지도
쪽잠 든 툇마루에할아버지 들숨날숨깨금발 뙤약볕은움찔움찔 뒷걸음질한 뼘씩산그림자가코 낮추는 한나절 여름의 별미는 뭐니 해도 양푼에 보리밥과 열무김치 넣고 한 숟가락 고추장으로 버무려 뚝딱 비우고 나면 그저 그만이지요. 거기다 후식으로 시원한 찬물까지 벌컥대고 나면 기세당당한 하장군(夏將軍) 땡볕도 슬슬 뒷걸음질을 치게 되
일 나간 엄마 오길기다리다 잠든 아이뒤채는 꿈결에서자꾸자꾸 불러댄다통통배달려오는 소리에번쩍 눈뜬 아침해 어느 때 보다 세계 경제가 어렵다 보니 요즘 많이들 힘들어하는 것 같네요. 하지만 이럴수록 흔들림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꾸준히 헤쳐나간다면 반드시 고난은 물러나게 되겠지요. 가족은 가족끼리, 사원은 사원끼리 서로
울 밑에 심심풀이로꽃씨 몇 알 뿌려 놓고까맣게 잊고 있었는데어느새 싹이 트고줄기가 자라봉숭아꽃 분꽃이고맙다고 웃는다.그 때꽃씨 뿌리길 참 잘했지날마다 메우는 나의 일기쓰면서 쓰면서“에이, 일기는 뭣하러 쓴담?”투덜댔는데먼 훗날그 일기를 읽어보니온갖 기억 되살아난다.그 때일기 쓰길 참 잘했지 지금은 전설처럼 되었지만 지난
세면대 위 비누곽들 쌓여 있네오이비누 쟈스민비누 백합비누 계피향비누이름을 모르는 산꽃비누도 있네히말라야 산록 작은 산골마을 가게에서 이 비누들 샀네몸 씻을 때마다 산냄새 펄펄 나네산백합 닮은 비누 팔던 아가씨환하게 웃는 모습 떠오르네비누가게 옆 작은 초등학교 아이들 책읽는 소리 들리네천권의 책을 더듬었으나 길은 점점 아득한데개울물에 종이배 띄우는 아이에게책
한 해 허리가 접힌다계절의 반도 접힌다중년의 반도 접힌다마음도 굵게 접힌다동행 길에도 접히는 마음이 있는 걸헤어짐의 길목마다 피어나던 하얀 꽃따가운 햇살이 등에 꽂힌다 6월 달력을 넘긴지 며칠 되지 않습니다. ‘계절의 반도 접히고 한 해 허리가 접히고 중년의 반도 접히고 마음도 굵게 접힌다.’한 해의 절반. 책갈피 귀퉁
꽃 한 송이가 마음 하나라면저 많은 작은 꽃들이 모여 한 개의 알처럼 두근거리자면몇 개의 마음을 주먹밥처럼 뭉쳐야 하는지환하고 둥그런 저 설레임이모서리를 자르며 입은 상처들을 꾹꾹 뭉쳐 놓은 것이란 말인지하나의 마음도 주체하지 못해서들었다 놓았다, 풀었다 맺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변덕을 부리다가, 꽃의 몸을 빌려 빵반죽처럼 부풀어도 되는지 예식장의 버진로
고향에서 택배로 보내온감자의 온몸이 울퉁불퉁하다아마, 땅속을 경작하면서 얻은따뜻한 상처들이거나아침저녁 벌레들에게보시 공양한 흔적들인 것 같다어느 날베란다에 저장해 둔 감자는울퉁불퉁한 제 몸에 길을 열고환한 등불을 걸었다비록 온몸은 울퉁불퉁하지만어머니가 내신 길은 따뜻하다 요즘 한창 제 맛을 내는 햇감자 철입니다. 더구나
가출이 아닌 출가이길 바란다떠나온 집이 어딘가 있고 언제든 거기로 돌아갈수 있는 자가 아니라돌아갈 집 없이돌아갈 어디도 없이돌아간다는 말을 생의 사전에서 지워버린집을 버린 자가 되길 바란다매일의 온몸만이 집이며 길인,그런 자유를……바란다, 나여 잠시 집을 떠난 자는 다시 돌아 올수 있기에 자신에
어제 내린 비에꽃 접시곱게 닦아빨강분홍하양접시마다햇살 담아 놓고누굴 기다리나?돌담길지나가는 사람들얼굴은 몰라도햇살 한 그릇씩꼭꼭먹여 보낸다 사물의 모양새와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꽃들이 많지요. 방울 같은 은방울꽃, 초롱을 쏙 빼닮은 금강초롱꽃, 나팔을 부는 듯한 나팔꽃, 이 말고도 할미꽃, 강아지풀, 애기똥풀, 닭의
진짜 꽃 같은 가짜 꽃가짜 꽃 같은 진짜 꽃가려내는 법은?물컵에 꽂혀 있으면진짜 꽃빈컵에 꽂혀 있으면가짜 꽃꽃과 물이 맘 통해야진짜가 되지향기가 되지. 세상엔 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도 참 많지요. 특히 실내 장식용으로 제작된 꽃과 조경수가 그 으뜸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그냥 보기엔 오히려 만들어진 꽃
파도가 한 번씩밀려올 때마다조금씩 조금씩쌓이는 알들누가 이렇게 많이낳았을까?파도가씻고 또 씻어닦고 또 닦아몽돌 몽돌 해진바다가 낳은 알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다 보니 쉽게 파도소리를 접할 수 있지요. 이런 천혜의 아름다움 때문에 동해나 남해, 서해 어디를 가 보아도 바닷가에는 예쁜 알들이 많지요. 차르르 사그득 다
비오는 날은난타 연주회가 열린다.지붕도 두드리고나무도 두드리고아스팔트도 두드리고내 마음도 두드린다.다다다 닥 두두두 둑타타타 탁 뚜뚜뚜 뚝빗방울은 두드리고나는 들썩들썩 장단을 맞춘다. 연중행사로 시작된 장마. 여름날에만 즐길 수 있는 비의 축제지요. 자~ 이제 검은 구름홑청으로 커튼을 칩니다. 연잎 방석 위에 올라앉은
너무 오래오래 살아늙고 늙어 주름 투성이오오래 바라보니불그스레 예쁘다나도야 오래오래 살며연지 곤지 찍고 싶다. 그릇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토기. 여기다 예술성을 가미하여 질그릇 표면에 문양을 넣은 것 중 하나가 빗살무늬토기지요. 현란하게 빗금 치는 빗줄기 같은, 촘촘한 참빗 사이로 얼비치는 햇살 같은, 강가 서걱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