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760년 음력 사월 초하룻날, 신라 하늘에 변괴가 일어났지. 제8대 아달라이사금 때엔 하늘에서 해와 달이 사라져 되찾았는데 제35대 경덕왕 19년에는 해 두 개가 하늘에 열흘 동안 나란히 떠 있었지. 일관이 왕에게 긴히 아뢰었어. 인연 있는 법사를 모셔와 산화가를 부르면 재앙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에 조원전의 단을 깨끗이 씻고 왕이 청양루에 친히 나가
서기 692년에 효소왕이 즉위하여 망덕사를 세웠겠다. 755년 경덕왕 때 이 탑이 흔들리더니 안사의 난이 일어났지. 신라 사람들이 말했어. 당나라 황실을 위해 절을 세웠으니 마땅히 그 영험이 있을 것이다.효소왕 8년에 망덕사에서 낙성회를 열고 친히 공양하는데, 한 비구가 거지 차림을 하고 몸을 움츠린 채 뜰에 서서 청했지. 이 부덕한 중한테도 한자리 끼워주
경흥 법사는 웅천주(지금의 공주) 사람. 열여덟 살에 승려가 돼 그 이름을 날렸지. 681년에 문무왕이 하직할 때 왕자에게 뒷일을 부탁했겠다. 경흥 법사를 국사로 모시는 걸 잊지 마라. 그 뒤 신문왕은 경흥을 국사로 책봉하고 삼랑사에 살게 했단다.어느 날 경흥이 한 달 넘게 앓아누웠는데 한 여승이 찾아왔지. 스님의 병은 근심으로 생겼으니 계속 웃으면 낫습니
신라 문무왕 때 광덕과 엄장이라는 두 승려가 있었지. 광덕은 경주에 있는 분황사 서쪽마을에서 짚신을 삼으면서 아내와 함께, 엄장은 남악에서 농사를 지으며 혼자 살았단다. 둘은 사이가 두터워서 누구든 먼저 극락에 가는 사람이 뒷사람에게 알려주기로 했어. 엄장이 먼저 죽으면 그의 땅을 광덕이 갖고, 광덕이 먼저 죽으면 엄장이 광덕의 아내와 사는 걸로 약속하고.
신라 경덕왕 때 강주(지금의 진주)에서 있은 일이야. 아간 벼슬을 하는 귀진에겐 욱면이라는 계집종이 있었지. 벼슬아치들이 죽어서 극락에 가려고 미타사를 세우고 만일기도를 하는 중이었어. 욱면이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선 법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뜰에 서서 염불을 따라했지. 주인은 집안일을 해야 할 종이 절까지 따라오니 남들 보기에도 체면이 서질 않았어. 하루는
신라 진평왕 때 안흥사의 여승 지혜가 불전을 수리하려 했으나 힘이 모자랐어. 어느 날 꿈에 선도산의 성모가 나타나 일렀지. 지혜야, 참 기특하구나. 지금 내가 있는 자리 밑을 파보면 금 열 근이 나올 게야. 다음날 꿈에서 본 그 자리를 파 보니 황금이 그대로 나오거든. 지혜는 이 금을 팔아 불전을 수리할 수 있었어.이 선도산 성모는 본래 북방 황실의 딸로
명랑 법사는 선덕여왕 때의 비범한 승려. 사간 재량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소판 무림의 딸 김씨로 자장 법사의 누이동생. 나중에 국교 대덕이 된 큰아들을 낳고, 의안 대덕인 둘째아들을 낳았지. 그리고 꿈에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삼키고 태기가 있어 막내를 낳으니, 명랑이 난 게야. 한마디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거지.법사가 당나라에서 도를 닦고 오는 길이었어.
경주 남산에 살던 한 아이가 배가 고파 냇가에서 수달을 잡아 구워먹고 뼈를 버렸겠다. 이튿날 그 뼈가 사라진 거야. 핏자국을 따라가니 뼈가 굴속에서 제 새끼를 감싸고 있거든. 그 길로 아이는 승려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혜통이란다.혜통이 당나라의 삼장법사를 찾아갔으나 오랑캐라며 받아주질 않는 거야. 혜통이 시중들며 3년을 버텼는데도 허사였어. 하루는 화로를
밀본은 일찍이 금곡사에서 살았지. 김유신하고는 친했는데 사람들은 이름조차 몰랐어. 한번은 김유신의 친척인 수천이 중병을 앓았겠다, 유신이 거사를 보내 진찰하도록 했지. 때마침 수천의 친구인 인혜 법사가 치료하고 있었는데, 거사를 깔보며 말했어. 자네의 몰골을 보니 순전히 아첨꾼이군. 무슨 재주로 이 병을 고치겠는가? 내 신통력이나 구경하게. 그리곤 향을 피
유가종(법상종)을 연 대현 법사는 남산 용장사에 살았지. 이 절엔 장육석상이 있었어. 대현이 그 주위를 돌면 돌부처도 따라 얼굴을 돌렸대나. 대현이 배운 유가종의 법전은 뜻과 이치가 그윽하고 깊어 해석하기가 어려워서, 명사 백거이도 다 알지 못해 이렇게 말했어. 법상종 법전은 뜻이 오묘하여 알기 어렵고, 사물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인명(因明)은 낱낱이 따져
심지 스님은 신라 제41대 헌덕왕의 셋째아들로 앞날이 창창한 왕자였지.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깊고 천성이 맑고 지혜로워 승려가 되기에 좋은 성품이었어. 열다섯 살에 스승을 좇아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지금의 팔공산인 중악에서 승려 생활을 시작했지.하루는 속리산의 영심 스님이 그의 스승 진표 율사로부터 부처의 뼈로 만든 계법(戒法)을 전해 받아 점찰법회를
승전 스님의 생몰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 행적은 일부 남아 있지. 승전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후에 배를 타고 당나라에 가서 법장을 찾아갔어. 그는 스승의 미묘한 가르침과 사려를 쌓아 지혜로운 안목이 일찌감치 뛰어날 수 있었고, 화엄경의 깊은 원리를 탐색하고 은밀한 내면을 찾아내어 오묘하게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지. 그리고는 인연이 있는 곳으로 가고자 생
진표는 완산주(지금의 전주) 사람. 성은 정씨. 열두 살 때에 개구리를 잡아 꿰곤 개울에다 던져두었겠다. 이듬해에 우연히 개울에 갔을 때, 그 개구리가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살아있는 걸 보고 죄책감을 느껴 머리 깎고 출가를 했지. “나는 일찍이 당나라에 가서 삼장법사께 배운 다음 오대산에서 문수보살께 오계를 받았니라.” 금산사의 숭제 법사가 말했지. 진표가
경주에 살던 한 홀어미가 남편도 없이 태기가 있어 아기를 낳았어. 아이는 나이 열두 살이 되어도 말을 못하고 기어 다니므로 사복(蛇福)―사파(蛇巴)라고도 함―이라고 불렀지.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그때 원효가 고선사에 있는 원효를 찾아갔어. 원효는 예를 다해 그를 맞이했으나 사복은 답례도 하지 않고 말을 했어. 그대와 내가 옛날에 경전을 싣고 다
의상의 속성은 김씨. 29세에 경주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어. 그 후 당나라로 건너가려고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갔는데, 변방 군사들에게 첩자로 오인되어 잡혔다가 풀려났지. 마침 본국으로 들어가는 사신이 있어 그 배를 타고 당나라에 갔고, 거기서 종남산 지상사에 들어가서 지엄 선사를 만났어. 지엄은 새벽꿈에 신라의 큰 나무 하나가 가지와 잎이 퍼
원효의 성은 설씨. 어머니가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했지. 만삭으로 밤나무골을 지나다가 양수가 터져 남편의 옷으로 가리고 원효를 낳았어. 해산할 때 오색구름이 온 땅을 덮었지. 그때가 617년(진평왕 39년).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스승 없이 혼자 공부를 했어. 의상과 함께 공부하러 당나라로 가던 중 땅막에서 자다 목이 말라 맛있게 마
자장율사는 글을 잘 쓰고 잡기에 물들지 않았어. 혼인을 하였으나 부모를 일찍 여의자 원녕사를 짓고 출가를 했지. 산속에서 가시덤불을 둘러친 채 움직이면 찔리게끔 해놓고, 머리는 들보에 달아 혼미한 정신을 바로잡았어.왕이 그를 재상에 등용하려고 여러 번 불렀으나 관직을 맡지 않았어. 칙령을 내려 목을 치겠다고 해도, 하루 계율을 지키다가 죽을지라도 백년간 계
혜공은 천진공의 집에서 품팔이하던 노파의 아들. 어릴 때의 이름은 우조였어. 공이 종기가 도져 앓아누웠지. 병문안하는 사람들이 늘어서자 우조가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이렇게 손님이 많으냐고 물었어. 어머니가 우조를 꾸짖었지. 어른께서 병이 나 돌아가시게 됐는데 넌 그것도 모르느냐. 일곱 살 난 우조가 나섰지. 제가 그 병을 고쳐 볼게요. 그 말을 전해들은
승려 혜숙은 화랑 출신이야. 어느 날 그가 자취를 감추자 호세랑은 화랑의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빼버렸지. 혜숙은 적선촌(지금의 안강)에 숨어서 20년을 넘게 살았어. 그때 대표화랑인 국선 구참공이 적선촌에 와서 종일 사냥을 하자 혜숙이 그의 말고삐를 잡고 청했어. 사냥하는 데에 따라가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공이 허락했지. 그는 옷을 벗어부치고 말을 타고
아리나 발마는 불교를 배우러 당나라로 간 신라의 승려. 부처의 가르침을 찾아 627년에서 649년 사이, 장안에서 천축(인도)까지 걸어가 나란타사에 머물렀지. 나란타사는 학승 1만명과 교수 1500명이 있던 세계 최초의 대학이야. 아리나 발마는 이 절에서 율장과 논장을 익히고 조개껍질에 경전을 베껴 쓰며 도를 닦았지.나란타사의 허물어진 터에는 무너져 내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