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양지법사는 석장(지팡이)을 부린 도승. 석장은 그의 신통력을 나타내는 상징이지. 석장 끝에 자루를 매달아 여염의 담벼락에 걸어두면 시주하는 이가 곡식이나 돈을 넣어주고. 하루 내내 일만 하는 법사 대신 석장이 스스로 돌아다니면서 시주를 받아오는 거야. 자루에 시주가 가득 차면 법사에게 다시 와서 부려놓는, 신라 천년왕국에서 유일무이한 마법의 지팡이야
원광법사는 본래 진한 사람. 도량이 넓고 글을 잘써 이름을 떨쳤지. 그럼에도 중국 선승들에겐 미치지 못하던 때였어. 그가 삼기산에서 수행하기를 4년째. 한 걸승이 와서 법사의 토굴 옆에 절을 지은 거야. 그는 주술을 배웠어. 어느 밤, 법사가 불경을 외울 때 신의 소리가 들렸지. 요새 많이들 수행하지만 그대처럼 법대로 하는 이는 드물도다. 이웃에 있는 중을
“신라의 태대각간 최유덕. 살던 집을 기부하여 지은 절이 유덕사. 그의 먼 후손인 최언위가 유덕의 초상을 이 절에 모시고 비석도 세웠다.” 유덕사에 대해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록의 전부란다. 이 절에 있던 석조여래좌상은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4호. 지금 청와대 뒷산에 있어. 눈꼬리를 살짝 치켜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석굴암 본존불같이 잘생긴 석불로 경주 남산
충원공은 신라 제31대 신문왕 때의 재상. 서기 683년에 이미 온천욕을 한 사람이야. 진골이던 그는 ‘빽’을 믿고 공무 중에 빠져나와 목욕을 즐겼나 봐, 물 좋은 동래온천에서. 거기 노천족탕 옆에는 온정개건비가 있어. 조선 영조 때 동래부사가 개축을 축하하여 세운 기념비지.잘 걷지도 못하는 할머니가 한날은 다리를 저는 학을 본 게야. 학이 뜨거운 김이 나
경주 동북쪽에 있는 무장산. 이 그윽한 골짜기는 산을 깎아 놓은 듯 가파르고 골이 깊어 저절로 숙연해지지. 일상의 고민을 내려놓고 도를 즐길 만한 곳이야.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 대아간이 숙부를 기려 세운 절이 있었지. 절에 아미타불 전각이 있었는데, 이는 소성왕의 비 계화왕후가 대왕의 죽음에 피눈물을 흘리며 상심한 끝에 그 음덕을 기리려고 세
학은 하루에 딱 열두 번 운다. 흰 깃털은 먼지나 흙이 묻지도 않는다. 암수는 160년이 지나서 만나 눈만 마주치면 알을 낳는다. 1600년간 먹이를 잡지도 않고 물만 마신다. 옛 그림에 선인들이 타고 다니던 날개 달린 동물의 우두머리로 이천 년을 산다. (相鶴經記)에 나와 있어.울산에도 학이 유명하지. 터줏대감 학성 이씨에다 울산학춤도 있고,
636년, 자장법사가 중국 오대산의 문수보살을 만나려고 당나라에 갔지. 태화연못 가의 돌부처(문수보살)한테 기도했더니 부처가 꿈속에서 범어로 된 네 가지 게(부처의 가르침이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로 된 글귀)를 주거든. 한 승려가 와서 법사의 게를 풀이해줬지. 꿈에 받은 게는 법사가 이미 불교 이치를 깨달았고, 본래의 성품이란 지닌 바 없으며, 이처럼 불교
가야 수로왕의 궁궐 연못에 독룡이 살고 있었지. 만어산(밀양 삼랑진)에 살던,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나찰녀가 독룡과 정을 통하는 바람에 흉년이 찾아왔어. 왕이 주술을 부려 금하려고 해도 안 되자 부처를 청하여 법을 설하게 했지. 나찰녀가 계를 받은 뒤로는 농사가 잘 되고, 동해의 어룡들이 돌로 변했지.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를 본떠 경각심을 일으키게 만든 목
서라벌의 승려 조신이 세달사에 머물 때 절에 온 아리따운 낭자에게 첫눈에 반했지. 낭자는 김흔공 태수의 딸이었어. 날마다 낭자와 연분이 맺어지기를 관음보살에게 빌었지만 그 낭자에게 배필이 생긴 거야. 조신은 관음보살을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울다가 그 자리에서 지쳐 쓰러졌겠다.그때 낭자가 찾아와서 환하게 웃거든. 일찍이 스님을 뵙고 내심 좋아서 잠시도 잊지
경덕왕 때에 한기리의 여자 희명이 아기를 낳았지. 까꿍 하면 까르르 웃고, 도리도리 하면 고개를 요리조리 가로젓던 이 웃음동이가 다섯 살이 되었어. 어느 날, 잠을 자고 나서도 밤인 줄 아는 게야. 아침인데 왜 해가 안 떠? 엄마, 어디 있어? 아이가 눈앞이 깜깜하다 하거든. 엄마는 여기 있고 넌 거기 있고, 해는 하늘에 떠 있다고 해도 아이가 울기만 하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못 말리는 죽마고우. 스무 살 때에 누가 먼저 도를 이루나 시합을 했어. 둘은 같이 입산을 했지. 부득은 백월산 동쪽 고개에 돌무더기를 쌓아 그 속에서, 박박은 북쪽 고개에 판자로 짠 암자에서 정진한 게야. 돌멩이로 만든 뇌방이네, 판자로 맞춘 판방이네 어쩌네 서로 핀잔을 줬대나, 두 방 다 비는 줄줄 새는데. 부득은 미륵불이 되고 싶
화랑제도는 신라 제24대 진흥왕 때 생겨났지. 그보다 먼저 만들어진 건 원화제도야. 왕은 여염에서 똑똑하고 이쁜 처자들을 뽑아 나라를 이끌 상징으로 삼았지. 이들에게 효도와 우애와 충성과 신의를 가르쳐 나라의 근간으로 삼으려 한 거야.치열한 경선 끝에 남모랑과 교정랑을 대표원화로 뽑고 원화 무리 수백 명을 모았지. 그런데 왕이 더 예쁜 남모를 편애했어. 질
수행승의 성스러운 증거인 사리는 몸뼈 사리, 두개골 사리, 치아사리로 나뉘지. 이 사리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때가 신라 진흥왕 때인 서기 549년. 양나라의 사신 심호가 몇 과를 지니고 온 게야. 선덕여왕 때엔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부처의 머리와 어금니, 몸뼈 사리 100과를 지니고 왔고 그걸 황룡사탑과 대화사탑, 통도사 계단(戒壇)에 보관했지. 통도사
우금리에 사는 가난한 여자 보개에게 장춘이라는 아들이 있었지. 아들이 장사꾼을 따라 배를 타고 가선 소식이 없었어. 보개가 민장사 관음보살 앞에서 7일간 기도했더니 글쎄, 아들이 돌아온 거야.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장춘이 대답했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배는 부서지고 다들 죽었지만 저는 조각난 배에 몸을 싣고 당나라에 닿았죠. 어떤 사람이 저를 데려다가 들
경주 북쪽에 있는 소금강산, 그 산의 남쪽에 백률사가 있지. 그곳은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에 세운 자추사(刺楸寺)였어. 자는 잣이니 백과 같고, 추는 밤이니 율과 같아 백률사(栢栗寺)로 바뀐 게야. 가파른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맨 먼저 사람을 반기는 건 마애돌탑. 단층에 나무기와를 인 대웅전은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야. 범종을 치면
서기 992년에 중생사의 주지 성태가 관음보살상을 우러러 말했어. 저는 이 절에서 향을 부지런히 올리고 밤낮 정진했습니다. 우리 절에 양식이 없어 이제 향을 올릴 수 없습니다. 다른 데로 가야겠습니다. 그리고 깜박 졸았는데, 꿈속에서 관음보살이 나타났지. 그대는 떠나지 마라. 내가 향 피울 비용으로 쓰게 시주를 모아주겠다. 성태는 기쁜 마음으로 이 절에 머
옛날 중국의 한 황제가 말하기를, 세상의 어떤 인물그림도 짐의 애인보다 못하다고 했지.하루는 제일가는 화공을 불러 애인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겠다. 멋지게 그려가던 화공이 그만 붓을 떨어뜨려 배꼽 밑에 붉은 점이 찍힌 거야. 화공은 점 하나쯤은 날 때부터 있을 수도 있지, 짐작하여 그대로 그림을 바쳤어.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지. 겉모습은 똑같은데 암만 봐도
신라 제54대 경명왕 때 흥륜사의 남문과 좌우 건물에 불이 났어. 정화와 홍계 두 스님이 절을 고쳐지으려고 용을 썼지. 어느 날 이상한 소문이 생겨났어. 제석신이 절의 경루에 내려와서 열흘간 머물렀더니 전탑과 풀과 나무와 흙과 돌에서 그윽한 향기가 나고, 오색구름이 절을 휘감고, 연못의 물고기들이 기뻐서 뛰놀더래.제석신이 그만 돌아가려 하니 두 스님이, 만
선덕여왕 때 생의 스님은 늘 도중사에 머물렀지. 한 스님이 그를 데리고 남산으로 올라가서 풀을 매어 표시하고, 남쪽 골짜기에 이르러 말하는 거였어. 내가 이곳에 묻혔으니 대사께서 꺼내어 고갯마루 위에 묻어 주시오.눈을 떠보니 꿈이었지. 생의 스님은 친구와 함께 꿈에서 표시한 곳에 가서 땅을 파니 진짜 돌미륵이 나오는 거야. 그 미륵을 끄집어내 밧줄로 감아
신라 진평왕 때(587년) 일이야. 죽령 동쪽 백리쯤 되는 산에서 갑자기 사방이 한 길씩 되는 큰 돌이 생겨났지. 사면에 여래상이 새겨진 이 돌은 붉은 비단에 싸여 하늘에서 산꼭대기로 떨어진 거였어. 왕이 행차하여 바위를 받들어 절하고 그 옆에다 대승사를 지었지. 그리고 주지를 청하여 그 돌을 모시니 분향하러 사람들이 몰리거든. 이 산을 사불산이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