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다. 어딘가로 자꾸만 떠나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떠났다 돌아오면 일상의 중압감이 그대로인데도 혼자서 무작정 길을 떠난다.일억 사천만년 전에 생성된 우포늪의 갈대숲 사이를 걸어 다니기도 하고 억겁의 시간이 깔린 늪 위로 일몰이 덮여 오는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했다.이른 봄 고목에 핀 홍매가 보고 싶을 땐 무작정 순천행 버스에 올라타기도 했다
가을 햇살이 깊어가는 11월 둘째 주말, 가까운 지인들과 부부동반 나들이로 내원을 찾았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1천명의 제자들을 머물게 하기 위해 내원사와 89개의 암자를 지었다는 천성산은 산세가 빼어나고 계곡이 깊어 사계절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다.30여 년 전에는 덜컹대는 시외버스를 타고 와서 친구들과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찰방
아침 마다 우리 집 작은 마당에는 고양이 네 마리가 현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집 마당냥이들이다. 일 년 전 깊어가는 가을 이맘 때쯤 만난 녀석들이다.가을비 온 뒤 끝이라서 그런지 찬바람이 제법 부는 날이었다. 아침 대문을 열다가 나는 골목길 가득 날아다니는 쓰레기들에 당황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쓰레기 봉투들이 저렇게 난장을 피운
선선해진 젖은 들판, 익은 벼이삭의 고개가 더 무거운 듯 허리까지 숙이고 있습니다. 풍년 들었겠지요? 올 여름이 뜨거웠지 않습니까. 잦은 가을비가 근심이 되기는 합니다만, 결실의 계절입니다. 가을엔 열매만 풍성한가 했더니 봄부터 차례로 피기 시작한 꽃들이 화려한 여름꽃을 거쳐 농밀한 가을꽃으로 바뀌었습니다. 가을에 피는 꽃도 의외로 많습니다. 봄과 여름에
지난 주말 남편과 함께 원주에 있는 예담요양원에 다녀왔다. 그곳엔 몇 년 동안 치매를 앓고 있는 시어머님이 계신다. 작년까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기도 하고 기어 다니기도 하였다. 올해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치매를 앓기 전 어머님은 꿋꿋하고 강단이 무척 센 분이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3년 뒤부터 어머님의 노화는 눈에 띄게 진행되었다.
그날은 뭐가 씌어도 단단히 쓰인 날이었다. 지난해 가을 어느 토요일, 당일 챙겨야 할 결혼식은 두 건이었다. 문학회 선배의 혼사는 경주에서 정오에 있었고, 한 시간 반 뒤 포항에서 이종사촌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외출 채비를 마친 뒤 봉투서랍을 여니 축의금 봉투가 동이 나 있었다. 다른 문우들이 부탁한 축의금 때문에 봉투가 제법 많이 필요한
요즘 텔레비전에서는 ‘묻지 마’ 변을 당한 여성들 소식이 잇달아 보도되고 있어요. 혼자서 등산을 하다가 변을 당한 중년의 여성부터 남자 친구하고 노래방 갔다가 화장실에서 변을 당한 젊은 여성의 사건 소식은 끔찍해서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아요. 대낮에 횡단보도를 건너던 여학생이 둔기에 맞는 사건은 또 어떻고요. 심지어는 학부모가 섬마을 여선생을 집단 성폭행한
까치 소리가 하도 요란하여 창밖을 내다보았다. 집 뒤에 서있는 커다란 회화나무에서 까치 두 마리가 이 가지 저 가지로 옮겨 다니면서 목청껏 노래하고 있었다. 칠백 년이란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듯 나무둥치는 온통 검은 빛이었지만 이웃집 옥상까지 제멋대로 뻗어나간 나뭇가지에는 새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올라간 우듬지에는 까치집이 정겹게 자리를 잡고
삼월 말의 메타세콰이아는 지금 나목이다. 잎들이 풍성했을 때는 잘 보이지 않던 새둥지들이 지금은 훤히 보인다. 쑥쑥 자란 나무 우듬지 가까운 곳에 튼실하게 지은 둥지는 한 나무에 한 개 또는 두 개가 있는 것도 있지만 드물게 세 개의 둥지가 층층이 있는 것도 있다. 시부모님이 갑자기 가시게 된 요양병원,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세 개의 둥지는 그냥 예사
삼월 볕은 어딘지 어릿어릿한 표정이다. 음력 이월 영등할매 서슬로 꽃샘바람한텐 아예 주눅이 든다. 햇살이 매화수술 밑에 깔리고 벚꽃망울 위에 머뭇댄다. 더구나 “기-미년 삼-월 일일 저엉오-오--” 태극기 물결 속에 비장하고 장엄하게 첫날을 시작하는 삼월에 나대지 말자고 스스로 삼가는 태도다.삼월 달은 봄이라고, 봄옷을 입고 나서면 잊지도 않고 꽃샘추위가
겨우내 눈을 굶고 지내다 호남지방 폭설 소식에 귀가 번쩍, 영하 7℃의 새벽 공기 속으로 입김을 뿜으며 고속버스를 탔다. 지난밤 광주에 사는 친구가 폭설 소식을 전해주며 충동질한 게 결정적인 동기였다. 시가지가 마비될 정도로 눈이 많이 왔다는데, 거기 가서 갇힐지도 모르는데, 아니 내심 눈 속에 갇히길 바라면서 차를 탔는지도 모른다.폭설 소식에 부랴부랴 찾
얇은 목화솜을 두어 조끼를 만들고 있습니다. 흰 솜 같은 눈이 오시나 가끔 밖을 내다봅니다. 시끄럽고 어지러워 마음 졸인 연말이었잖아요. 한 번쯤 온 세상이 새하얗게 변하면 모두에게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얀 눈이 내려준다면 목화솜 두어 짓는 옷에 눈꽃이 도톰하게 돋을새김이 되겠지요.바느질을 하며 나윤선의 재즈 아리랑을 듣습니다. 볼륨을 살짝 높여
오늘은 뵌 적 없는 아버님의 제삿날이다. 꾸덕하게 마른 생선을 꺼낸다. 제사상이나 차례상에는 생선을 올리기 마련인데, 우리 집에서는 조기, 민어, 돔을 빠뜨리지 않는다. 조상님이 좋아하시고 밀어주시고 도와주신다는 믿음에서다.명절이나 제삿날이 다가오면 매번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고 편치 않은지 모르겠다. 늘 해오던 일인데도 해를 거듭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부담
구월 중순만 되어도 산마을에는 월동 준비가 시작된다. 이미 벌레 소리가 잦아들고 풀과 나무는 단풍을 준비하느라 미동도 않고 엎드려 있다. 자연 따라 나도 가을 설거지를 시작한다. 이른 감은 있지만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채 겨울을 맞을 수도 있을 만큼 변화무상한 날씨 때문이다.잦은 가을비를 맞고 웃자라 우묵한 풀부터 뽑는다. 그냥 두면 풀씨가 떨어져 순식간
떠나고자 마음먹으니 일사천리였다. 도시의 중심부를 맴돌던 시간이 수십 년. 버티다보면 언젠가는 뿌리 박혀 영영 살리라 여겼다. 사통팔달의 편리한 교통, 가까운 일터, 관공서, 대형마트에서 벗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편리함이었다. 그런데 치솟는 집값과 생활비를 쫓아가다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었다. 중심부에서 방 한 칸 오롯이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