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둑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할머니는 메밀밭에서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늦여름의 하늘빛이 메밀꽃 위에 빛나고메밀꽃 사이사이로 할머니는 가끔나와 바람의 장난을 살피시었습니다.해마다 밭둑에서 자라고아주 커서도 덜 자란 나는늘 그러했습니다만할머니는 저승으로 가버리시고-중략-할머니는 나를 두고 메밀밭만 저승까지 가져가시어날마다 저녁이면 메밀밭을 매시며메밀꽃 사이사이로
고개를 숙이고 몸을 구부리면 깊숙한 주머니가 생깁니다. 주머니 속에얼굴을 집어넣습니다. 이목구비를 갖춘 이미지 하나 사라집니다.오늘부터 시작되는 장마,창문 밖으로 세상이 흠뻑 젖는 것을 바라보다가나는 이 기분이 언젠가 삽입된 적 있는날씨라고 생각했어요. 주머니 속 얼굴을 뒤져요눈과 바람과 얼음과 먼지 속에서 비는찾을 수 없었고-중략-주머니를 붉은 항아리에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본다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엎드려 그 젊은 주검
발 달린 벌을 본 적 있는가벌에게는 날개가 발이다우리와 다른 길을 걸어꽃에게 가고 있다뱀은 몸이 날개고식물은 씨앗이 발이다같은 길을 다르게 걸을 뿐-중략-먼저 갈 수도 뒤처질 수도 없는한 걸음씩만 내딛는 길에서발이 아니면 조금도 다가갈 수 없는몸을 길이게 하는 발새는 허공을 밟고나는 땅을 밟는다는 것뿐질기게 걸어야 하는 것도 같다질기게 울어야 하는 꽃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원고지그 투명한 감정의 호수에 낚시를 드리운다사색의 등불을 달고 자음과 모음으로 직조된 돛단배 하나미명의 어둠 헤치고 물길을 연다바람을 가르는 물의 파장이 고요처럼 맑다직관과 사유의 밑밥을 뿌리며심연의 시어(詩魚)를 기다리는 나는외롭고 고독한 한밤의...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하늘에선가 바람이 불어온다.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 작용하는백골을 들여다보며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백골이 우는 것이냐.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중략-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백골 몰래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그다지 죄 될 것도
날마다 새로운 문제지가 우리를 기다린다떨리는 마음으로 각자 주어진 과제를 받아 들고진지하게 지문을 읽는다답안지의 빈칸은 수험생을 설레게 한다.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문제가 어렵다고 지레 겁먹을 때가 아니다.마음을 비우면 근심은 사라지는 법이다.아무도 나를 대신해주지 않는다.재촉하는 소리가 빗발쳐도 참아야 한다.헐뜯는 말이거나 응원하는 말이라도 가려 들
사타구니께가 간지럽다죽은 형제 옆에서풀피리처럼 울던 아기 고양이잠결에 밑을 파고든다그토록 곁을 주지 않더니콧망울 바싹 붙이고허벅지 안쪽을 깨문다나는 아픈 것을 참아본다-중략-자면서 입맛을 다시는 것들의 꿈은 쓴가더듬는 것들의 갈증 때문에벽을 흐르는 물소리그림자 밖에서 꼬르륵거리고우리는 타인이라는 빈 곳을 더듬다가지문이 다 닳는다
하인리히 하이네(김광규 옮김)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모든 꽃봉오리 벌어질 때나의 마음속에서도사랑의 꽃이 피었어라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모든 새들 노래할 때나의 불타는 마음을사랑하는 이에게 고백했어라 시 노래다. 하이네가 일천팔백이십칠년에 발간한 시집 에 수록돼 있다. 이를 다시 슈만이 노래로 만들면서 더 유
이 땅에 빙하기가 시작된 지 백년이 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빙벽, 핸드폰으로도 뚫고 들어갈 수가 없다. 연애도 머리로 하는 얼음인간들은 옆방에서 시체 썩는 냄새조차 맡을 줄 모른다. 외마디 신음소리조차 들을 줄 모른다. 빙하기에도 살아남은 벌레인간들은 돈 위에다 집을 짓고 돈 이파리를 뜯어먹고 산다. 흙보다 땅을 더 좋아하는 신인류, 한 자리에서 같은
-상략-‘사돈’가깝다고 느껴지면서도먼 사이참 난감하다달리 할 말도 없고어정버정 쓸 글도 생각나질 않는다오작교는 아니지만아들과 며늘아기가 놓은다리를 건너다 간간 뵙게 되는 날사돈!거나하게잔이나 부딪칩시다 그려하하 사람 사이의 거리는 모닥불에 불 쪼이는 정도로 하라는 말이 있다. 너무 가까우면 뜨거워서 불편하고 너무 멀면
버들개지 떠도는 석양, 하산(下山) 길 나뭇짐엔산중 부귀를 말리는 이 따로 없어짐마다 덤으로 얹힌 한 아름씩의 진달래! 송홧가루 날리는 계절이다. 참꽃 시든 지도 한참 지났다. 짧은 한시 속에 아련한 그림이 떠오른다. ‘늙은 여자는 없다. 여자는 사랑하고 사랑 받는 한 늙지 않는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다. 여자뿐이겠는가. 남자도 마찬
내 몸이 모르는 일을 나는 했네난타의 박자처럼 춤추는 팔짓이것은 기술을 넘어서는 것내가 따르는 것은 다만 도(道)일 뿐머리를 올릴 때 보이던 소는삼년이 지나자 보이지 않았네이제는 정신으로 소를 대할 뿐내게는 뼈들 사이의 결만 보이네-중략-내 몸이 모르는 일을 나는 또 했네난 문혜왕을 위해서 춤을 췄지만그대는 내 움직임을 볼 수 없었을 뿐내 몸의 일부 같지
어머닌 불맛을 안다고 하셨다불간이 잘 배어야 음식은 맛있는 법이라며여린 불, 센 불소금 대신 불구멍으로 간을 맞추셨다이 모두,벼락에 구워진 들소의 안창살을 맛봤다던네안데르탈인을 닮았던 아버지 때문이었다-중략-그랬다, 그즈음 당신 배 속의 불길은활활 요원(燎原)으로 번지고도 남음이 있었다안방에서 속살 타는 냄새, 행랑까지 새 나왔으며습습한 날 그 냄샌, 낮은
참깨 과자 부스러기를 먹으려고개미들이 늘어서서기어가고 있다좁은 문 앞에서 모서리를 따라땅 끝을 넘어 마루를 가로질러땅바닥까지 이어져있다줄 맨 끝에 있는개미 한 마리를핀셋으로 집어 올려과자 바로 앞까지옮겨 주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빵 터졌다. 반전의 재미다. 개미에게 투영된 시인의 억눌린 감정을 봐버려서다. 언제부턴가 세상
어머니의 젖을 빨다 잠이 든 갓난아이할아버지 옆에 앉아서 잠이 든 어린 손자연인의 품에서 잠깐 잠이 든 시인이발소 의자에 앉아서 잠이 든 청년시골길 달리는 짐차의 뒤 칸에서 잠이 든 노동자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곤하게 잠든 병사들잠 속에 깊고 깊은 평화가 있다그 속에 바다 파도, 갈매기, 고향포구소나무 숲 너머 길고 긴 모래밭이 있다
아, 저 사과나무 끝에서 빨갛게 익은 달콤한 사과.과일 따는 사람들이 잊었거나너무 높이 매달려 따지 못한.또한 언덕 위의 히아신스.양치기들이 무심코 발로 밟았지만,땅 위에서 자줏빛을 보여주는 꽃들. 사포는 서정시의 시조이며 대모다. 기원전 6세기 때 사람이니 혼의 영생을 보는 느낌이다. 오늘날 여성동성애자를 지칭하는 레
조용히 조용을 다한다기웃거리던 햇볕이 방 한쪽을 백색으로 오려낼 때길게 누워 다음 생애에 발끝을 댄다고무줄만 밟아도 죽었다고 했던 어린 날처럼나는 나대로극락조는 극락조대로먼지는 먼지대로 조용을 조용히 다한다 지구는 소리의 집이다. 그 소리를 감싸는 막이 고막이다. 텅 비어야 꽉 차는 것이니, 달팽이 관 안에 모여 든 그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청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간혹 길고양이 새끼들이 커가는 걸 보면 신이 내린 형벌 중에 어린 것을 자라게 하는 벌이 가장
뿌리가 흙을 파고드는 속도로내가 당신을 만진다면흙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놀라지 않겠지느리지만한 번 움켜쥐면죽어도 놓지 않는 사랑 느림의 미학을 일깨운다. 소낙비처럼 급작스레 온 마음보다 드는 줄 모르게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멀스멀 스며든 情(정)이 더 무섭다.화분의 흙과 뿌리의 관계처럼. 드는 줄 모르게 천천히 스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