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묘사 장륙존상. 신라 선덕여왕 때 두두리(頭頭里)라는 귀신의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연못을 메우고 세웠다는 이 절에서 양지 스님이 찰흙으로 부처상 셋을 빚었지. 제35대 경덕왕 때인 764년에 존상에다 금칠을 했는데, 그 비용이 곡식 2만3700석 값이 들었대. 영묘사는 특별한 절이었어. 여러 번 불이 나서 고쳐지었고, 판관까지 두고 관리했거든. 스님이 만
에밀레, 에밀레에라…. 에밀레종 소리의 사연을 듣고 가슴 졸지 않은 어린이가 있을까? 종 속에 든 아기가 엄마를 부르는 애끓는 소리. 피눈물이 뚝뚝 듣는 쇳물이 굳기 전에 김필월이 왕을 칭송하는 명문(銘文)을 새겨 넣었지. 그 덕에 역사에 이름 석 자를 남겼고.기념비적인 공사에는 공명심에 사로잡인 이들이 이름을 새기려고 난리지. 당시에는 왕에게
8세기에 동방에서 제일 큰 종이 만들어졌어. 신라 35대 경덕왕 때인 754년에 만든 황룡사종이야. 크기가 어른 키만 하고 두께는 한 뼘이 좀 넘는 데다 무게가 49만7581근이나 됐어. 삼모부인이 스폰서로 나섰고 이상택의 하전이 종을 만들었어. 삼모부인은 경덕왕의 첫 왕비. 왕이 스물한 살 나던 봄에 아들을 못 낳는다고 궁 밖으로 쫓아냈지. 태자를 못 낳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길을 가다가 문수보살을 만난 건 신라 제27대 선덕왕 때인 636년이었어. 법사가 태화연못가를 지나는데 한 신인(神人)이 나타났지. 자장더러 여긴 왜 왔소, 물었겠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을 위해 왔다고 대답했지. 신령과 자장은 이렇게 묻고 답했겠다. 신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소? 나라의 북으로
서기 553년 봄, 신라 제24대 진흥왕 때였지. 용궁 남쪽에다 궁궐을 지으려 하자 황룡이 나타났어. 그래서 궁궐 계획을 바꾸어 절로 지었지. 공사를 한 지 17년 만에 완공하여 그 이름을 황룡사라 했단다.그 후 어느 날이었어. 큰 배 한 척이 하곡현 사포(울주 곡포)에 나타났지. 배 안에는 공문이 적혀 있었어. 서축(인도)의 아소카왕이 황철 5만7000근
보덕 스님은 평양성에서 살았지. 하루는 한 노승이 경전 강론을 부탁했어. 그는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열반경 40여 권의 교리를 설명해줬지. 열반경 제7권에 나오는 ‘모든 중생은 여래의 성품이 있다’라는 대목에선 조주선사 어록에 나오는 이런 문답도 했을 터.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노승이 물었겠다. 허면 불성이 누구에게 있을까, 개는 분별심이 있어 불성
김해 허왕후릉에 파사석탑이 있지. 원래는 호계사에 있었는데 옮긴 거야. 파사(婆娑)는 산스크리트어로 일체의 지혜가 지금 나타난다는 뜻이야. 옛날 이 마을이 금관국에 속했을 때 허황옥이 아유타국(인도)에서 배에 싣고 온 거란다. 서기 48년 당시 그 먼 곳에서 돌탑을 배로 들여왔다는 게 믿긴 어렵지만 파사석의 영험을 보면 믿지 않기도 어려워. 당장 남해 금산
옛 어르신들이 말씀하셨어. 옛날 고구려 성왕이 국경을 순행하던 길에 이 성엘 들렀지. 갑자기 오색구름이 땅에 드리워진 것을 보곤 그 속으로 들어갔더니 어떤 승려가 지팡이를 짚고 있더래. 근데, 가까이 가면 승려가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다시 나타나는 거였어. 그곳엔 삼층탑이 있었는데 위는 솥을 엎어놓은 듯했지만 그게 뭔지 알 순 없었고. 다시 가까이 가서 승
신라 월성 용궁 남쪽에 가섭불이 앉았던, 돌로 된 자리가 있었어. 그 자리가 있던 데가 석가모니 이전 부처시대의 절터이고 황룡사지는 그 당시 일곱 절이 있던 곳의 하나라지. 서기 553년 이른 봄날 진흥왕이 신궁을 세우려고 터를 팠단다. 그 자리에서 황룡이 나타난 게야. 왕은 깜짝 놀라 신궁 대신 황룡사로 고쳐지은 게야. 그때 가섭불이 앉은 자리는 황룡사의
동경(경주) 흥륜사 금당에 신라 십대성인의 소상이 있었다네. 금당에는 대개 주존불(석가모니 부처상)과 열 제자나 열여섯 나한상을 두는데, 그 자리에다 십대성인을 앉힌 게지. 동쪽에서 서쪽을 보는 이는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이고 서에서 동을 향한 이는 아도, 염촉(이차돈), 혜숙, 안함, 의상이란다.아도는 그 모습이 해괴한데도 맨 앞자리에 있는 건
고구려 제27대 영류왕 때(625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불교와 도교를 배우기를 청하니 당나라 황제가 좋아라고 했지. 뒤이어 보장왕이 즉위하자 재상 연개소문이 왕에게 아뢰었어. 지금 유교와 불교는 함께 성하지만 도사들은 성치 못하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들여오자고. 그때 반룡사에 있던 보덕화상이 도교가 성하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 질 거라고 여
우리 역사에 부처 같은 왕이 있었어. 그 이름은 법왕, 599년에 즉위한 백제 제29대 임금이지. 법왕은 살생을 금지시키는 조서를 내려 민가에서 기르는 새매를 풀어주게 했고 물고기 잡는 기구를 불살라서 사냥을 금지시켰지.‘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불교의 오계 중 하나. 가난한 백성들은 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돼지를 풀어주고 닭도 풀어줬지. 가축이라는
백성의 복을 닦고 과인의 죄를 빌고 싶구나. 527년 어느 날 법흥왕이 말했지. 신하들은 절을 짓겠다는 왕의 생각을 따르지 않았어. 왕은 함께 할 신하가 없음을 탓했지. 이 때 소신남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차돈이야.그는 왕을 보필하는 무신이 되길 바랐어. 스물두 살 나이에다 직책은 맨 하위직인 사인이고. 그가 왕의 뜻을 알아채고 아뢰었지. 나라를 위해 몸
신라 19대 눌지왕 때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에 왔지. 모례가 집에 굴을 파서 그를 머물게 했단다. 그때 왕녀가 위독해서 묵호자가 축원하여 병을 낫게 했어. 왕의 사례를 받곤 묵호자가 사라졌지. 사람들이 불교를 삿되게 생각해서 몸을 숨겨야했거든.한편, 21대 비처왕 때 아도가 시자 셋과 모례의 집에 왔는데 그 생김새가 묵호자와 닮았대. 나중에 그는 죽고
백제 제15대 침류왕이 즉위한 384년에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불교를 전하러 아무포로 왔지. 아무포는 영광굴비로 유명한 지금의 법성포란다. 왕은 그를 맞아 궁중에 두고 공경했어. 이듬해에 새 도읍인 한산주에 절을 세우고 승려 열 사람을 두었으니 이것이 백제 불교 시작이란다.간다라 출신인 마라난타는 아미타여래상과 경전을 배에 싣고 왔어. 백제 신하들이 그것들을
서기 372년 소수림왕이 즉위한 해에 불교가 처음 들어왔단다. 순도가 전진에서 불상과 경전을 갖고 고구려에 온 게야. 374년엔 아도가 동진에서 왔어. 이듬해 봄에 초문사를 세우고 순도가 이불란사를 세워 아도가 주지를 맡았지.당시 고구려인들은 마을 한복판에 버젓이 무덤을 두고 살았어. 조상신이 계신 붉은 산으로 개가 영혼을 데려다준다고 믿었거든. 어떤 이들
태초에 천지가 열려 비로소 이 땅이 밝아지고 인륜이 생겼지만 가야 땅에는 임금이 없었지. 부족을 이끄는 아홉 간이 있었을 뿐 나라가 없었으니 누가 보살피랴. 보다 못한 천제가 발 벗고 나섰지. 구지봉 마루에 나타나선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춘 게야. 사람들이 가보니 형상이 없고 그곳에서 소리만 들리는 거야. 모두 노래를 불러 한 자리에 모였음을 아뢰고, 춤을
국경을 넘은 사랑도 잠시, 서기 189년 봄에 허황옥 왕후가 먼저 하늘로 갔지. 수로왕과 혼인한 지 142년, 나이 157세로 세상을 뜬 게야. 믿기지 않지만 달리 증명할 길은 없어. 현대의학도 사람을 157년 살게 하진 못하지만, 단군할아버지는 1908년을 살았고, 청나라의 이청운이 256세를 살았다니, 그러려니 해야지. 그게 아니라면 역사를 왜곡했거나,
서기 48년에 구간이 수로왕한테 아뢰었지. 대왕, 장가드셔야지요. 저희들의 딸아이 중에서 가장 예쁜이를 짝으로 삼으소서. 왕이 말했어. 내가 여기에 온 건 하늘의 명령이오. 짝을 맞이하는 것도 그분의 명이 있을 테니 염려 마시오.어느 날, 왕은 유천간더러 말과 배를 준비해서 망산도에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을 승점으로 보냈는데, 남해 서쪽에서 돛단배가 붉은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어. 임금도 신하들을 부르는 이름도 없었고.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이 있었지. 이들 9간(아홉 추장)이 이끌었는데, 사람 수가 7만천이었어.서기 42년 춘삼월, 이들이 살고 있는 북쪽 산봉우리에서 무언가를 부르는 소리가 났겠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이삼백 명이 모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