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단 대표한 ‘신해음사’송년, 신해음사로 등단 구소와 활동김윤식·장지연·한용운·이해조 등당대의 명망가들과 함께 문학창작사회활동 우수…사생활은 불량민립대학·야학 등 계몽활동도 일조부인과 자식 있었지만 구소와 동거재산 많았지만 탕진하고 일찍 타계울산문인 중앙문단서 활동 주목지역문인 재조명, 타지역서 잇따라이상숙 시비 건립장소 문제로 방치現울산문
근대화 재벌인 차용규씨 장남으로장인 김좌성씨도 유명한 땅부자日와세다 대학 나온 지식인으로서울서 인쇄소 차려 큰돈 벌기도신민당 울산지구당 부위원장으로공천 나섰으면 금배지 달았겠지만혼탁한 정치판 사정 탐탁지 않았고평생 남들과 경쟁해본적도 없어 고사8대총선 공천과 관련 최형우 후보가 두려워했던 인물이 김재호 박사와 차재훈 부위원장이었다. 이들 둘은 최 후보에 비
경부고속道 건설로 이후락과 첫 인연언양 농토 도로편입 반대운동 관련언양면장으로 존경받던 박 후보에이후락 도움 요청…면민 설득 앞장8대총선 낙선, 정치에 발 끊어7대 대선 부정선거로 공화당 고전이후락 문중·동심회에서도 외면야당 ‘3기 7암’ 유언비어도 한몫대부분의 울산시민들은 8대 총선에서 공화당의 박원주 후보가 당선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울산에 연고없지만 득표에 최선다해임신한채 울주군 오지마을 누비기도정몽준 의원의 부인 김영명 여사심완구 의원의 부인 홍길순 여사 정갑윤 의원의 부인 박외숙 여사 등검소·모범적인 생활로 내조에 앞장흔히들 선거의 3요소로 인물, 자금, 조직을 든다. 이에 못잖게 중요한 것이 후보자 부인의 내조다. 해방 후 많은 국회의원들이 울산에서 배출되었고 이들이 국회의원이
8대 울산 총선의 특징은 최형우 의원의 등극이다.1971년 5월 치러진 8대 총선은 이 보다 한 달 전인 4월 실시된 7대 대통령 선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7대 대선은 공화당의 박정희 대통령이 무리한 3선 개헌을 한 뒤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와 맞붙었기 때문에 선거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투표결과 박 대통령이 당선되었지만 울산은 개
7대총선의 또 다른 특징은 우송 최영근 의원의 정계 은퇴다. 최 의원은 비록 2선 의원이었지만 6대 국회에서 비중 있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지역구도 탄탄했다. 김기홍, 안도원, 정계석, 심완구 등 나중에 울산을 대표하는 야당 인사들 중에는 최 의원 아래서 정치를 시작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최 의원의 낙선은 지금까지 그를 도왔던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7대총선에서 우석 이후락이 설두하씨를 공화당 후보로 천거한 것은 교육자로 설씨가 울산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당시만 해도 지방 학생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경기고 출신이었던 설 후보는 교육자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모범을 보였다. 그는 풍금을 잘 탔고 ‘울산시민의 노래’를 작사하는 등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운동도 좋아해 검도 3단으로 교육자로 활동
7대총선에서 설두하씨를 대리인으로 내세웠던 우석 이후락이 가장 걱정했던 것이 김성탁의 출마였다. 이 선거에서 김씨는 공화당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물러서지 않고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김씨가 다시 출마한 것은 나름대로 당선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6대 총선에서 비록 낙선했지만 당시 지역사업을 많이 해 놓아 7대 선거에서 주민들이 지지해 줄 것으로
우석 이후락과 우송 최영근은 6대 총선 때까지만 해도 서로 우호적이었다. 우석은 6대 총선에서 야당의 우송을 공화당 후보로 출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우송을 불러 공화당 후보로 울산에서 출마해 줄 것을 요청한 것도 우석 이후락의 건의가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우송은 박 대통령의 요청을 거부하고 야당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중앙 요직에
1967년 6월 치러졌던 7대 울산 총선의 특징은 중앙의 실세였던 우석 이후락이 선거에 깊숙이 관여한 것이다. 이 선거에서 우석은 자신의 대리인으로 설두하씨를 여당인 공화당 후보로 내세웠을 뿐 아니라 설 후보의 당선을 위해 야당의 최영근 후보 선거자금을 봉쇄했다. 이것도 모자라 권력으로 김성탁씨를 중도에 사퇴시키기도 했다.울산에서 이 선거에 출마했던 후보는
우송 최영근과 우석 이후락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석의 민주당 시절 행적과 그가 언제부터 정치에 뜻을 두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1924년 울산 웅촌면 석천에서 태어났던 우석은 울산농고(3회)로 진학했다. 고교시절에는 석천에서 학교가 멀어 중구 교동 330번지 누나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당시만 해도 울산농고는 실업학교로 농업위주의 교육을 했
최영근(崔泳謹)의원의 호 ‘우송(友松)’은 그의 민주당 선배였던 정헌주 의원이 ‘소나무처럼 늘 푸르고 정직하게 살아라’는 뜻으로 붙여주었는데 그는 호처럼 평생 정직하게 살다가 타계했다.우송은 울산에서 5대와 6대 등 두 번 국회의원을 지낸 후 13대 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평민당의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을 한 번 더 했다.두동면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
국회의원 중 울산에서 가장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던 정치인이 김성탁씨였다면 도의원으로 가장 격동의 세월을 보냈던 인물이 김정린씨다.병영출신으로 초대 도의원을 지냈던 그는 나중에 김택천과 김성탁 의원이 출마했을 때 그들을 돕는 등 한 때 울산 정치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일제강점기때 정미소 2곳 운영경남 최대 규모…엄청난 부 축적1952년 초대 경
50년 울산헌정사로 볼 때 김성탁 후보는 가장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만일 정치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부자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 분노를 참지 못하고 보복성 출마를 무리하게 하는 바람에 엄청난 재산을 모두 날리고 나중에는 무위도식하는 신세가 됐다.1922년 북구 어물동에서 태어났던 그는 4, 5
공화당 창당을 앞두고 백암 정창화씨가 도심에서 사람들을 많이 만났던 곳은 ‘허장렬 선술집’이었다. ‘허장렬 선술집’은 정식 상호가 아니고 술집 주인이 허장렬씨다 보니 붙여진 이름이다. 이 술집은 중구 성남동 동아약국 사거리에 있었다. 백암은 당시 ‘허장렬 선술집’에 대해 자서전 에서 다음과 같이 그려 놓고 있다.“공화당 사무국 일을 하
5·16후 2년 7개월의 군정을 거쳐 1963년 11월 치러진 6대 총선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우선 선거구역의 확대로 선거구가 과거 239개구에서 133개구로 줄어들어 울산도 과거 갑·을구 2개 선거구로 나누어 2명의 국회의원을 뽑던 것을 울산과 울주를 합해 1명의 의원만 선출하게 되었다. 전국구가 도입된 것도 이 때다.피마자 재배로 농촌 수익증대
이달 초 5대 총선과 관련, 김태호 국회의원 글을 쓰면서 김 의원의 생가를 마을 사람들이 ‘명당’이라고 부른다고 했더니 의외로 풍수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 많았다. 최근 들어 풍수와 관련된 명당 얘기가 시선을 끄는 것은 정주영 전 회장의 집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최근 언론은 서울 가회동에 있는 정 전 회장의 집이 400억원이라는 고가에 거래가 될지도 모른
5대총선의 특징은 개혁파의 대대적인 선거 출마였다. 울산만 해도 신교환, 탁장제, 이수갑, 김병룡이 개혁의 기치를 들고 출마했다. 이들이 개혁을 외친 것은 개혁이야 말로 4·19혁명을 완수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이들의 생각은 좋았지만 당시 우리사회는 이런 혁명적인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다. 실제로 이승만의 장기집권과 독재는 우리사회
5대총선의 특징은 대학생들의 선거 참여다. 이전까지만 해도 선거 때면 주로 일반인들이 후보자를 도왔지만 이때부터는 찬조연설에서 대학생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다.최영근 의원만 해도 5대 총선에서 부산대학생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부산대학교 학생들은 아예 ‘공명선거 추진위원단’까지 만들어 울산에 와 최 의원을 도왔다.울산 강동 출신으로 부산대학교 학생이었던 김
5대총선은 4·19 혁명 3개월 뒤 시행되었기 때문에 울산에서는 자연 보도연맹 문제가 뜨겁게 달아올랐다.6·25전후 발생한 보도연맹 관련자 학살 사건에서 울산은 다른 지역에 비해 희생자들이 많았다. 보도연맹은 1949년 6월 결성되었다. 단체가 결성된 것은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했거나 이와 관련된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서였다.그러나 보도연맹은 당초 계획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