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도화지에 처음 그린 얼굴입이 없어 완벽하다평생 살아내야 새길 수 있는 주름살 같은 선(線)은다빈치도 그려낼 수 없는 입술을 감춰놓고 있다아이 같은 마음에게만 그려지는 숨겨진 입술이 비칠 때선은 주름의 본성을 드러내고 숨쉬기 시작한다-중략-한 사람의 사랑 고백을 부추겼던, 뺨의 홍조는또 얼마나 많은 불면의 지우개가 문지른 핏빛일까내 소리를 주리틀어 말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시를 읽다보면 아바타가 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시간을 주무르는 시인조차 사랑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나보다.여기 지성에 병든 스물세살 청년이 있다. 나라는 이웃에게 몸은 폐결핵에 강탈당했다. 마
서너 달이나 되어 전화한 내게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고 할 때나는 밥보다 못한 인간이 된다밥 앞에서 보란듯 밥에게 밀린 인간이 된다그래서 정말 밥이나 한번 먹자고 만났을 때우리는 난생처음 밖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처럼무얼 먹을 것인가 숭고하고 진지하게 고민한다결국에는 보리밥 같은 것이나 앞에 두고정말 밥 먹으러 나온 사람들처럼묵묵히 입속으로 밥을 밀어넣을 때-
칼보다 날카로웠다 닿기만 하면상처를 입혔다 무뎌진 것은 뜻밖에도맹맹한 맹물 때문이었다 맹물은멋대로 모난 고집불통을 강물 속으로밀어 넣었다 더 뽀족한 각을 가진 것들이-중략-날씬한 몸매로 찰방찰방 물위를걸어 다닐 수 있게 된 경신술의 고수수제비돌요즘은 하루 종일 물가에 앉아 물새들발자국 찍어주는 모래와 친구 맺는 중이다강물에 어리는 산 그림자 바라보며소리 없
탁자 위에 오렌지 한 개양탄자 위에 너의 옷그리고 내 침대 속의 너지금은 달콤한 현재밤의 신선함내 삶의 따사로움 시를 읽으며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과 발렌시아 지방의 거리를 측정한다. 이 시는 발이 없다. 동사가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와락, 와서 안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은 스페인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로 향한
해남사 자비의 집 앞에경칩을 맞은 노인들 하나 둘해동을 합니다실팍한 햇볕에 굳었던 근육자근자근 물이 돌고요의자가 놓이고 콧수건 같은 보자기가슴을 에두른 모범생이 되어가위손 펑키족 청년을 올려다 봅니다세월의 함몰에오물오물 회심곡 부스러기 쪼는 입반짝 피어 선명한 저승꽃생의 탁본입니다 노인들이 새봄을 맞아 이발하는 장면을
청진기를 대자오래된 나무는할머니 심장처럼 느렸다빈 그네에 태워나무는 떠난 소년을 밀고 있었다꽃 피우면 힘들잖아나이테 갈피로 녹음된 목소리가더딘 호흡을 맴돌고 있었다약한 허리 쪽으로 깍지벌레들이 습격했다-중략-나무는새의 울음으로 울었다노을 쪽을 잘라 나갔다소년이 나무를 잃을 때까지나무가 소년을 잊을 때까지 제목이 백조의
오랜만에 아내를 안으려는데“나 얼마만큼 사랑해”라고 묻습니다마른 명태처럼 늙어가는 아내가신혼 첫날처럼 얘기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어나도 어처구니없게 그냥“무량한 만큼”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무량이라니!그날 이후 뼈와 살로 지은 낡은 무량사 한 채주방에서 요리하고화장실서 청소하고거실에서 티브이를 봅니다내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날은목탁처럼 큰소리를 치다가도아이들
제주읍에서는어디로 가나, 등 뒤에수평선이 걸린다황홀한 이 띠를 감고때로는 토주(土酒)를 마시고때로는 시를 읊고-중략-그럴 때마다 나의 등 뒤에는수평선이한결같이 따라온다아아 이 숙명(宿命)을 숙명 같은 꿈을마리아의 눈동자를눈물어린 신앙을먼 종소리를애절하게 풍성한 음악을나는 어쩔 수 없다 전쟁 중 서른여덟 유부남 시인은 제
마마가 돌던 해또래 중 혼자 살아남은 계집아이곰보라는 놀림에 눈이 붓도록 울었다엄마는 말했다울지마라 곰보자국은 하나님이 널 살려주신 증거란다내 몸에도 증거가 있다벼랑에서 굴러 이마에 찍힌 2㎝ 흉터앞머리로 가린죽음이 스쳐간 아찔한 흔적제왕절개로 아랫배에 달라붙은지네발도 숨겼다아이가 살아난 그 자리를 축소하고 싶었지만,신은 그때그때몸에 도장을 찍어 확실한 증
정오와 자정 사이달콤함과 웅성거림고소함과 단단함테이블과 흐느낌 사이바삭,부서질 수도퉁퉁 불어터질 수도분비물까지 뒤집어쓰면서나는 쿠키입니다 불의 뜨거움으로 탄생한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울겠습니다눈물도 없이(중략)이런, 또 사막에 놓일 줄이야모래는 내 안에도 충분하다고! 여기서 쿠키는 불의 자식이자 자아이다. 낮밤을 뜨겁게
갓난아기는 옹알이를 한다.그것은 천상의 언어이다.누구도 해득할 수 없는 암호 같은 말들,아기는 자라면서 차츰천상의 말을 하나 둘씩 거둬들이고,지상의 말을 익힌다.-중략-말 때문에 저지르는 갈등과 죄악사람은 이 세상을 하직할 때야 비로소그 죄악의 말문을 닫고 침묵한다.이 세상에 왔을 때 천상의 언어로옹알이를 하던 것처럼가족과 친지들 앞에마침내 알아듣지 못하는
절벽 위의 티벳 사원은 대체로 구름으로 지붕을 얽었다 구름 모자를 쓴 운모파 라마승들 사이 동자승의 재재바른 발걸음도 있다 그들은 구름의 시렁에 무시로 불구(佛具)를 올린다 그러니까 운해라는 말은 심금에서 절벽의 사원까지 펼쳐진 긴 두루마리 경전이다 종종 구름을 법명으로 받아들인 스님이 있다 푸른색과 흰색이 부딪치는 결가부좌의 상형으로 목판본에 새겨진 티벳
태양 위로 높이, 멀리 자라나꽃을 피우지어둠은 뿌리를 적시러흘러 다닌다밤, 눈까풀에서 떨어져 나온넋이 가는 곳돌에도 피가 돌고죽은 가지에선 얼마나 여린새 잎들이 내 돋는가곧 온다 너의 유년이말 흘려대는 잎사귀, 잎사귀저 밤,모든 꿈꾸는 것들의 양식향기도 없이 꽃들은 태어나고향기도 없이 꽃들이 죽는다 어둠이 뿌리 내린다는
梅(매화)얼음뼈옥 같은 뺨,섣달 다 가고봄 오려 하는데북쪽 아직 춥건만남쪽 가지 꽃 피웠네.안개 아침엔 빛 가리고달 저녁엔 그림자 배회하니찬 꽃술 비스듬히 대숲 넘나고암향(暗香)은 날아서 금술잔에 드누나.흰 떨기 추워 떠는 모습 안쓰럽더니바람에 날려 녹태(綠笞)에 지니 애석하도다굳은 절개 맑은 선비 견줄만 함 이로 아니우뚝함 말할진대 어찌 보통의 사람이라
시작하라, 다시 또 다시 시작하라.모든 것을 한입씩 물어뜯어 보라.또 가끔 도보 여행을 떠나라.자신에게 휘파람 부는 법을 가르치라. 거짓말도 배우고.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은 너 자신의 이야기를듣고 싶어 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만들라.돌들에게도 말을 걸고달빛 아래 바다에서 헤엄도 쳐라.죽는 법을 배워 두라.빗속을 나체로 달려 보라.일어나야 할 모든 일은 일
눈물 아롱아롱피리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다시 오지 못하는 파촉 삼만리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에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빛나는 책을 읽는다, 당신들은무기질 질료로부터 태어나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 책흔들리는 지하철 속에옛 관리의 홀(笏)처럼 하나씩 들고 읽는다거룩한 이론에서부터가벼운 하소연까지노랫가락에서 움직이는 그림까지온갖 유희와 소문들이 화수분처럼 가득한 책-중략-스스로 전혀 빛나지 않는,그래서 읽는 이의 내면에서빛을 낼 수밖에 없는,이 어두운 책을 들고 지하철
말 없는 것들은수직으로 잠이 든다무엇이든 오래 되면 과묵이 업이고침묵이 뒤꿈치 세우고 몸 꾸미는 아침마다물안개 머리를 풀어내는 산이 부럽다고사목은 죽어도 더불어 살고살을 베어 내어 꽃대를 말아 내듯이몸을 식혀 길 내는 법을 알아야성긴 지문을 지우고 꽃이 된다탑 쌓지 않아도 공덕 깨닫고작은 것은 아래로만 피어 생이 가볍고꽃의 반은 바람이 피우는데붉어야 사람도
먼 훗날 당신이 아파지면우리가 맨발로 걷던비자림을 생각하겠어요제주도 보리밥에 깜짝 놀란당신이 느닷없이 사색이 되어수풀 속에 들어가 엉덩이를 내리면,나는 그 길섶 지키고 서서산지기 같은 얼굴로오가는 사람들을 노려봤지요비자림이 당신 냄샐 감춰주는 동안나는 당신이, 마음보다 더 깊은몸속의 어둠 몸속의 늪 몸속의 내실(內室)에날 들여 세워두었다 생각했지요당신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