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31대 신문왕은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지었지. 바다에 묻힌 아버지를 위한 마음이 얼마나 갸륵했으면 그랬을까. 감은사지를 가보면 그 용이 드나들었다는 통로를 볼 수 있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아버지의 마음을 편안케 해 동해를 지켜달라는 바람으로 지은 이 절과 인연 있는 이야기는 이렇단다. 하루는 파진찬 박숙청이 “동해에 있는 작은 산이 감은사 쪽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아우른 뒤에 당나라 군대가 우리 땅에 머물렀지. 장차 신라를 치려하자 문무왕이 먼저 쳤어. 당고종이 “우리 군사를 청해다가 이기고선 우릴 친 까닭이 뭐냐”며 김인문을 옥에 가두었어. 그리곤 신라를 칠 50만 군사를 훈련시켰지. 의상법사가 김인문에게서 그 계획을 듣고 신라로 와서 전했어. 왕은 신하들과 나라를 지킬 궁리를 했지. 각간 김
장춘랑과 파랑은 처음에 백제 군사와 황산에서 싸울 때 죽었어. 그 뒤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둘은 무열왕의 꿈에 나타났어. “저희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고, 백골이 되어서도 종군하여 나라를 지킵니다. 하오나 소정방의 위엄에 눌려서 남의 뒤만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우리에게 백제를 칠 정예 군사를 주십시오.” 대왕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
신라 제29대 왕의 시호는 태종, 이름은 춘추.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가 선도산 꼭대기에서 오줌 누는 꿈을 꾸었지. 오줌이 흘러내려 월성이 잠긴 거야. 문희가 그 꿈을 사려 하자 보희는 비단치마를 주고 팔았어. 열흘 뒤, 유신이 춘추하고 공을 찼지. 부러 춘추의 옷끈을 밟아 떨어뜨리고선 집으로 데려갔어. 보희는 사소한 일로 귀공자를 가까이할 수 없다며 바느질
유신은 열여덟 살에 대표화랑이 되어 고구려를 치려고 했어. 화랑 백석이 그 계획을 알고 “둘이서 적국을 정탐한 뒤에 일을 치르자”고 했지. 유신은 그를 데리고 고구려로 떠났어. 밤길에 여인 셋이 나타나 음식을 대접하며 “백석 몰래 드릴 말씀이 있다”고 유신에게 속삭였지. 백석이 곯아떨어지자 세 여인이 유신을 숲으로 데리고 가서 말했지. “우린 나림, 혈례,
신라 제28대 진덕여왕은 태평가를 지어 당나라 태종에게 바쳤어. 그것도 비단에다 가사를 수놓아 선물한 거야. 당 태종은 이에 감동한 나머지 진덕여왕을 칭찬하고 신라왕으로 봉했지.큰 당나라 왕업을 세우니 드높은 님의 뜻 창성하여라/ 전쟁 끝나니 천하를 아우르고 문치를 닦으니 많은 임금 뒤를 잇네/ 하늘을 거느리니 좋은 비 내리고 만물 다스리니 모든 것이 눈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은 성은 김씨고 아버지는 진평왕이야. 서기 632년에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때 미리 알아맞힌 일이 세 가지가 있단다. 첫째는, 당나라 대종이 붉은빛, 자줏빛, 흰빛으로 그린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보내왔지. 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향기가 나지 않아요”하곤 씨를 심어보게 했어. 모란이 자라서 꽃이 피고 보니 과연 그렇거든. 둘째
신라 제26대 진평왕. 서기 579년에 임금이 된 그는 키가 11척(당시 1척은 20.2㎝로 추정)이나 되었대. 어느 날 창건한 천주사에 거둥하여 섬돌을 밟자 커다란 돌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단다. 왕이 신하와 승려들에게 말을 했지. “이 부러진 돌을 그대로 두고, 훗날 사람들이 보도록 하시오.” 이것이 월성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않는 돌 가운데
도화는 신라의 절세 미녀였지. 서기 576년, 제25대 진지왕이 그녀를 흠모했어. 어느 날 궁중으로 그녀를 불러들여 하룻밤을 요구했겠다. 도화는 “비록 천자일지라도 저는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습니다”고 항명한 거야.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느냐?” “목이 베여 죽을지언정 딴 데로 갈 순 없습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그땐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
신라 제24대 진흥왕은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었기에 태후가 섭정을 했지. 태후는 법흥왕의 딸 지몰시혜로, 법흥왕의 아우이자 지증왕의 아들인 사부지갈문왕의 비란다. 진흥왕은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은 채 37세 나이로 임종을 맞이했어. 서기 554년 구월에 백제가 쳐들어와 신라를 엉망으로 만들었지. 그 전에 백제가 신라와 힘을 합쳐 고구려를 치려고 했었거든.
신라 제22대 지증왕. 성은 김씨, 이름은 지대로 또는 지도로, 시호는 지증이야. 왕이 죽은 뒤에 그 공덕을 기려 붙여주는 시호가 이때 시작되었지.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이라는 임금 호칭을 왕으로 바꾼 것도 지증왕부터고. 지증왕의 음경이 어마무시했다는 이야기가 앞에 나와. 그 길이가 한 자 다섯 치라 배필을 구하기가 힘들었지. 온 마을을 찾아 헤
서기 488년에 신라 제21대 소지왕이 정월보름에 천천정으로 거둥했겠다. 까마귀가 날아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말로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보라”고 했대. 왕은 기마병에게 까마귀를 뒤쫓으라고 명했지. 기마병이 남산 동쪽에 가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거든.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게 싸움 구경. 기마병은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잊고 서성거렸지. 그때 한 늙은
서기 413년, 신라 제18대 실성왕은 제17대 내물왕의 태자 눌지를 죽이려고 했어. 태자가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는 동안 스스로 왕이 되었기에 그의 존재가 부담스러웠거든. 고구려 군사는 태자를 없애달라는 실성왕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지. 그의 어진 행실을 알았기에 창끝을 돌려 되레 실성왕을 죽였어. 그리고 눌지를 신라 제19대 왕에 추대하고 돌아간 게야.
원래 제목은 ‘내물왕과 김제상’이지만 사실(史實)과 내용으로 봐서 위와 같이 하는 게 맞을 거야. 눌지왕은 즉위 10년(서기 425년), 고구려에 볼모로 있던 아우 보해왕자를 구하려고 했어. 목숨을 걸고 갈 사람은 양산태수 박제상뿐이었지. 제상은 심메마니로 변장하여 고구려로 들어갔어. 미리 약속한 장소인 고성에다 배를 대놓고 보해를 빠져나오게 했지. 고구려
신라 제13대 미추왕은 김알지의 7대손이야. 대대로 벼슬이 높고 성스러운 덕이 있었지. 경주 대릉원에 있는 미추왕릉을 사람들은 시조 왕릉이라 부르곤 해. 그건 김씨 왕조를 연 시조 왕이라는 뜻이야. 미추왕은 왕이 된 지 2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단다. 제14대 유례왕 때 이서국 사람들이 쳐들어왔어. 신라에서 군사를 동원해서 막았지만 오랫동안 막아내지 못하고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서기 157년), 동해 바닷가에는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았대.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초를 뜯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나타나서 연오랑을 싣고 왜국으로 가버렸다네. 왜인들은 연오랑을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치켜세우며 그들의 왕으로 삼은 거야. 세오녀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바다에 나갔더니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이 바
혁명은 혁명을 부른다네. 박혁거세가 진한의 6촌을 아우르고 세운 신라는 외부 세력이 토착 세력을 이긴 결과이지만 토착 세력을 업은 혁명으로 세운 정권으로 볼 수 있어. 석탈해는 남방 용성국에서 들어와 신라의 왕족과 혼인한 뒤 역성혁명을 일으켰지. 김알지와 그 후손이 석씨 왕가를 뒤엎은 건 다시 역성혁명에 성공한 거고. 신라왕들은 박씨가 석씨로 넘어가고 석씨
석탈해는 용성국에서 온 사람. 가야를 쳤다가 수로왕에게 진 뒤에 뱃머리를 돌려 신라로 갔지. 물고기를 잡아 궁실에 진상하던 아진의선이 그 배를 발견했어. 탈해는 나무궤짝 안에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왔단다. 잘난 체하지 않고 신라의 관습을 속속들이 익히겠다는 뜻이야. 할멈은 탈해를 데려다가 토함산 돌집에서 길렀어. 삼칠일을 숨어서 산 뒤에야 탈해는 산자락에
신라 제3대 왕이 될 태자와 그의 자형인 탈해가 남해왕의 병상을 지키고 있었지. 남해왕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태자에게 왕위를 넘겨주려니 탈해의 야욕이 두렵고, 사위인 탈해에게 물려주려고 하니 그 자리가 아까웠거든. 그래도 정치는 현실이라는 걸 알았어. 왕이 태자의 의중을 알아보려고 넌지시 물어보았지. “나이가 좀 많은 사람이 신라를 이끌어 가면 어
남해왕은 차차웅이다. 이는 존장에 대한 호칭인데 오직 남해왕만을 그렇게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요,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며, 왕비는 운제부인이다. 삼국사기에 나온다.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으로 불렀다. 진한의 말로 왕이란 뜻이다. 어떤 사람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 하며, 차차웅 또는 자충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은 “차차웅이란 무당을 이르는 사투리다.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