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6일 김기홍씨가 울산시 북구 화봉동 자택에서 8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울산 사람들 중 고인이 60~7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고 특히 10월 유신 때 온몸으로 군사독재에 항거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그가 야당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 야학 김재호 박사가 울산에 오면서다. 이후 최영근, 최형우, 심완구씨의
야학(野鶴) 김재호(金在湖) 박사는 김인갑(金寅甲) 어른에 비해 울산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은 시기는 늦지만 60~70년대 울산 민주화 운동을 위해 온 몸을 바쳤던 인물이었다.단순히 정치활동에만 머물지 않았다. 초대 울산시의사회 회장으로 의술을 통해 소외계층을 돌보았고 1965년에는 울산로타리 클럽을 창립한 후 회장으로 지역사회 봉사에 앞장섰다.그는 울산의
4대 총선의 울산 특징은 선거에 출마했던 야당 최영근 후보를 중심으로 울산에서 본격적으로 야당 인사들이 나타나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거한 것이다. 1958년 실시되었던 이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호헌을 목표로 금권과 관권을 휘둘러 이에 따른 부정 선거가 많이 자행되었다.갑·을구에서 안덕기와 김성탁 등 자유당 후보가 모두 당선된 것은 이런 부정선거와 무관치
3대 을구 선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인물이 박장집 후보다. 출마 당시 53세로 주소는 하상면 반구리로 되어 있다. 직업은 농업, 경력은 중등교사, 무소속으로 1029표를 얻는데 그쳤지만 많은 일화를 남겼다.박 후보는 출마 동기부터가 특이하다. 2대 총선에서 당선되었던 김택천씨와 이웃으로 서원 마을에 살았던 그는 김씨가 부친의 후광으로 국회의원이 된 것을 못
정해영과 안준기 후보가 쟁패를 다투었던 3대 총선의 특징은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식으로 후보를 공천한 것이라고 하겠다.여당인 자유당 후보가 되면 우선 자금과 행정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후보들이 자유당 공천을 노렸다.이 같은 사실은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서 알 수 있다. 투표 이틀 전인 1954년 5월18일 동아일보는 ‘자유
3대 울산 을구 총선에는 정해영, 김택천, 이규옥, 안준기, 박장집이 출마했는데 이 중 승자는 해석(海石) 정해영(鄭海永) 후보였다. 선관위 기록에는 출마 당시 해석은 38세로 주소가 서울 종로구 명륜동, 학력은 부산 제2상 졸업으로 되어 있다. 자유당 후보로 1만6000여 표를 얻어 차점자인 안준기 보다 5000여 표나 앞서 당선되었다.해석이 자유당 소속
3대 울산 갑구에서 출마한 3명의 인물 중 김수선과 오위영씨는 이미 서술했다. 안덕기씨는 출마 당시 39세였고 주소는 울산군 삼남면 방기리 97로 되어 있다. 대학 중퇴 후 회사 사장을 지냈으며 자유당 소속으로 1만7400여표나 얻었다. 그러나 김수선 후보에 비해 400여표 뒤져 낙선했다.안씨가 선전한 것은 자유당의 지원이 컸기 때문이다. 3대 선거는 관권
3대 총선의 특징은 후보자들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라고 하겠다. 울산만 해도 2대 총선에서 갑·을구에서 각각 10여명이 넘는 후보들이 출마했으나 3대 총선에서는 4~5명으로 줄었다.이런 현상은 3대 총선부터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정당정치가 시작돼 여야가 추천하는 후보가 출마하면서 무소속 출마자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1952년 부산에서 발생한 정치파동은 당 공
2대 울산 을구 총선에서는 지금까지 거론되었던 김택천, 박태륜, 김두헌, 최현배, 임용길, 백만술, 고기철 후보 외에도 오영출, 조용진, 박명준, 변동조, 박곤수씨가 출마했지만 이들의 경우 득표수가 낮아 지금까지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출마 당시 41세로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던 오영출은 1400여표, 군속 3년의 경력으로 출마했던 조용진은 48세로 3
2대 총선에 출마했던 임용길 후보는 언론인으로 청년운동과 주민계몽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가 활동했던 일제강점기 울산 기자들 중에는 언론을 통해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들이 많았다.임 후보가 동아일보 기자로 발령받은 것이 1931년 5월이었다. 이후 그는 울산의 각종 사회단체에서 활동했고 울산을 대외적으로 알리는데 힘썼다.선관위 기록에는 출마 당시 51세
당선권에는 들지 못했지만 2대 총선에서 자금과 조직이 열세였던 박태륜 후보가 4500여 표나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대한청년단 활동의 도움이 컸다.해방 직후 울산에서는 어지러운 치안을 바로잡고 좌익 준동을 막기 위해 청년 조직이 여럿 만들어졌는데 이들 단체들은 대부분 중앙 지부로 활동했기 때문에 중앙 조직의 변화에 따라 이름도 자주 바뀌었다.해방 직후 울산에
김두헌 후보는 2대 총선에서 백만술 후보와 함께 방어진에서 출마했다. 출마 당시 나이는 55세로 사회경력에서 백 후보 보다 훨씬 앞섰다.백 후보가 대학 졸업 후 아버지의 권유로 출마한데 반해 김 후보는 일제강점기 면장과 어업조합과 금융조합장을 지내면서 청년운동을 열심히 벌였다.당시만 해도 유권자들이 후보들의 지역연고를 중시해 방어진에서 한명이 출마했다면 당
선거 초기 울산에는 후보자의 인물과 선거활동을 보여주는 선거구호가 많았다. 제헌 선거에 이어 2대 선거에도 출마했던 변동조 후보는 ‘또 나왔다 변동조’라는 소리를 이미 들어야 했고 ‘택도 없다 김택천’은 2대 당선 후 계속 출마해 낙선한 김택천 후보에게 붙여진 구호다.이외에도 안덕기 후보는 ‘안듣긴다 안덕기’라는 구호 때문에 3대에 낙선했고 ‘올랐다 오위영
외솔 준법정신 선거서 어려움 겪어상대 후보에 자금력과 언변서 열세당시 울산 비거주도 패인으로 꼽혀낙선후 일생바쳐 한글 연구에 매진도서기증으로 고향 울산사랑 보여동생 현구씨도 독립운동하다 순국무덤 찾기 사업은 아직도 진척 없어국어 사랑을 위해 평생 몸바쳤던 외솔 최현배 선생이 울산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한 것은 한글 전용을 법제화하기 위해서였다. 외솔은 한글이
2대 울산 을구에서 출마했던 고기철 후보는 일제강점기 온산면장을 지내면서 많은 기록과 일화를 남겼다.면장 재임기간이 무려 12년이나 되어 당시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면장을 지냈다. 해방 후 울산출신으로 면장을 오랫동안 지냈던 인물로는 최두종과 임인준 면장이 있다. 최 면장은 서생면장만 18년을 지냈고 임 면장은 두동면장만 13년간 역임했다.그러나 일제강점기
2대 총선에서 울산 을구에 출마해 당선됐던 동전(東田) 김택천(金澤天)씨는 추전(秋田) 김홍조(金弘祚)씨의 아들로 부친의 덕을 많이 봤지만 이 때문에 그의 청년 활동이 희석된 것도 사실이다. 그의 행적은 국회의원 시절보다 일제강점기 청년운동이 더욱 빛난다.출마 당시 그는 55세로 주소가 울산군 울산읍, 직업은 농업, 학력은 경성고보 졸업으로 돼 있다. 울산
日 와세다대학 전문부 경제과 졸업32세때 2대 총선에 출마했지만오랜 외지생활로 인지도 낮아 낙선5대 총선땐 부산서 출마, 또 고배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 활동이후 사회당 재건때 고문으로 추대2대 총선 울산 갑구에서 출마했던 송일환(宋日煥)씨는 학력에서 다른 후보에 비해 월등히 앞섰지만 선거결과는 11명 후보 중 5위로 성적이 좋지 못했다. 2대 총선 출
김규환씨는 일제강점기 언양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언양 수장이었던 면장을 장기간 역임했고 면장에서 물러난 후에는 언양의 대표적인 금융회사인 산업조합 이사를 지냈다. 당시 언양의 금융회사로는 산업조합 외에도 농협의 전신인 금융조합이 있었고 우체국에서도 주민들을 상대로 일부 여수신을 다루었지만 산업조합만큼 지역경제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김씨가
2대 총선에서는 서울 여의도에 순복음교회를 세운 후 세계적인 부흥사가 된 조용기 목사의 부친 두천씨도 출마했다.당시 조씨는 37세였고 주소는 울산군 삼남면, 직업은 농업, 학력은 중졸로 선거 결과 2600여표 밖에 얻지 못해 낙선했다.1913년 경남 함안의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던 조씨는 부산 동래고보를 다녔다. 고교 때는 공부를 잘해 수석으로 졸업한 후
선거 출마 당시만 해도 인물, 자금, 조직에서 타 후보의 추종을 불허했던 오덕상씨가 선거도중 출마를 포기한 것은 오위영 후보의 권유 때문이었다. 아울러 선거기간 동안 부각될 수 있었던 친일논란을 우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오씨는 당시 대학을 졸업했고 만석꾼이었으며 과거 청년운동을 해 조직이 튼튼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도 평의원에 출마해 당선된 경험이 있어 국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