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낮게 들썩인다. 폭설이 시작되자 밤의 나무들은 모두 街燈 아래로 모여든다. 먼 곳의 숲이 어진 나무들을 모아 이름 없는 산이 되고 스스로의 경계를 지우는 동안 나는 점찍을 수 없는 어떤 나라의 낡은 지도를 펼치곤 하였다. 어머니, 제발 엔카 좀 그만 부르세요. 그립지 않는 것도 가끔은 그리운 밤, 화해나 용서 같은 말에 밑불을 놓고 창밖으로 혀 내밀면
그렇게 나 홀로숲속으로 걸어갔네아무것도 찾으려 하지 않았지그것이 내 생각이었어.그늘 속에서 나는한 떨기 작은 꽃송이를 보았네별처럼 빛나며작은 눈동자처럼 아름다운.-중략-그러자 그 꽃은 조용한 구석에서다시 살아 났다네지금 그 꽃은 가지를 쳐가고자꾸자꾸 꽃을 피워가고 있다. 바람둥이 남편을 둔 아내는 세간의 입방아처럼 아둔
비가 온 뒤 플라자 호텔 앞 도로는수면이 맑게 닦인 호수 같다붉은 신호등이 차들의 침범을 막아 서울한복판에 3분간 딱켜져 있는 호수그 위를 잠자리 한 마리가공중에 필기체를 휘갈기며 날아간다가는 꼬리에 뽀글뽀글 가득 찬 저낳고 싶다는 본능이, 겨우 물로 매끼한 정도의수심 2mm의 호수에 혹했다저쪽 횡단보도엔 벌써파란 등이 이쪽으로 건너오겠다는 듯 깜박거리고
열무 삼십 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숙제를 해도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아주 먼 옛날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인간이 지닌
쌀을 씻어 안치는데 어머니가 안 보인다그리 멀지 않은 곳에 어머니가 계실 것이다나는, 김씨! 하고 부른다사람들이 들으면 저런 싸가지 할 것이다화장실에서 어머니가어!하신다나는 빤히 알면서뭐해?하고 묻는다어, 그냥 앉아 있어 왜?하신다(중략)어머니와 아들 사인데 사십 년 정도는 친구 아닌가밥이 끓는다엄마, 오늘 남대문시장 갈까?왜?그냥엄마가 임마 같다
풀밭에는 분홍나무풀밭에는 양 세 마리두 마리는 마주보고한 마리는 옆을 보고오른쪽 가슴으로굵은 선이 지나는그림 찍힌티셔츠한 장 샀어요한 마리는 옆을 보고두 마리는 마주보고-중략-그림 찍힌 티셔츠한 장 샀어요한 마리는 옆을 보고두 마리는 마주보고. 그의 시는 회화적이다. 세련된 이미지즘이라서 쉽게 읽히지 않는다. 얼마 전에
-상략-너는 이제 스무 살이다너는 여전히 기적일 것이다너의 사랑은 익어가기 시작한다너의 사랑은38선 안에서 받은 모든 굴욕이38번 밖에서 받은 모든 굴욕이전혀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너는 너의 힘을 다해서 답쌔버릴 것이다너의 가난을 눈에 보이는눈에 보이지 않는...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태백에 가야겠다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등 뒤에서아내가 구시렁댄다지가 열일곱살이야 열아홉살이야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올해 몇이냐고쉰일곱이라고-하략- 한 장의 수묵화가 펼쳐져 있는 듯하다. 허옇게 눈을 뒤집어
그때는 눈앞이 캄캄했다이후, 한 팔을 잃은 연주자는남은 팔을 자주 꿈속에 집어넣었다악몽에 자꾸 손이 갔다도로에 떨어진 팔을 찾아꿈의 꿈속까지 들어가 뒤졌다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고 싶을 때기댈 곳이 꿈밖에 없었다가끔 새소리를 좇다 기묘한 길로 들어섰다꿈의 밑바닥에서 자란 넝쿨을 타면나뭇잎에 붙어 있던 새소리가까마득한 이랴 소리의 묘지로 떨어졌다-중략-연주자
아무도 찾지 않는 강가를 걸었다바람을 업고 포도나무 반대편으로 몇 걸음 떼었더니당신이 젖은 손을 흔들던 쪽에서꽁지깃이 유난히 붉은,푸른 머리를 가진 새가 날아올랐다-중략-포도넝쿨은왜 한사코 서쪽으로만 뻗어 가는지포도밭에서 건너온 노을이흐르는 강물을 다 건너가기 전에포도나무도 모르는포도나무의 배후가 되고 싶었다당신도 모르는당신의 배후가 되고 싶었다.
행복이란사랑방에서 공부와는 담쌓은 지방 국립대생 오빠가둥당거리던 기타 소리우리보다 더 가난한 집 아들들이던 오빠 친구들이엄마에게 받아 들여가던고봉으로 보리밥 곁들인 푸짐한 라면 상차림-중략-평화란80의 어머니와 50의 딸이손잡고 미는 농협마트의 카트목욕하기 싫은 8살 난 강아지 녀석이등을 대고 구르는 여름날의 서늘한 무룻바닥영원했으면…하지만지나
옛 자리들은 햇빛을 받으며 침묵하네깊게 푸름과 황금 속에서 작아졌네부드러운 수녀들은 꿈처럼 서둘러 지나가네덥적지근한 너도밤나무 아래에는 침묵이갈빛으로 비추어진 교회에서죽음의 순결한 그림들을 바라보네,위대한 영주의 아름다운 방패왕관들은 교회들 안에서 은은하게 빛나네-중략-향을 태우는 연기, 테르(terre) 그리고 라일락의 향기는꽃무늬가 있는 창문에게로 비밀
시는 뱀이 되어 스쳐간다예언을 담은 단 한 문장은유가 되어 휙 지나간다그건 찰나보다 더 짧은 일깊은 꿈 속으로 사유의 틈새로뱀이 번쩍하며 지나갈 때재빠르게 잡아야 하느니!(……)접신(接神)하지 못한다면 끝이다뱀은 지나가고 나면 그뿐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시가 나를 스쳐 지나간다스쳐 지나간 저쪽에서 내 시는?의 똬리를 틀고 있다, 나
지상(地上) 가득한 죽음 지나 모든 물고기들이 먼저 문상(問喪)을 와 있었다 설악산 열목어도 와서 있었다 나 죄가 많다 문상만은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안면이 있는 버들치 각시붕어 등 몇몇이 나를 알아보는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민물고기를 먹지 못한다 어머니의 내 태몽이 한 마리 잉어였다 그걸 그들이 알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문상을 가보면 고인의 면면
항아리를 할머니로항아리 뚜껑을 할아버지로항아리 뚜껑 위에 쌓인 눈을 백발로항아리 옆의 감나무를 세월의 몽둥이로꺾어보는 사이에 저녁이 되었다반찬도 없는데 전신이 아프다백발과 할아버지를 젖히고할머니 속의 된장이뚝배기 안에서펄펄 끓는다 형태시다. 옹기나 된장 항아리를 본 뜬 행의 배열에 노부부의 일상이 드러나 있다. 유병장수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불붙은 개는 저쪽에서 달려올 테지댓잎이 나오는 지금쯤어린 장어는 강에 오르고열세 명이나 들어가던 늙은 팽나무엔 연초록 새잎이 돋고발목에 가락지를 채워 보낸 새는다시 돌아오고누가 개에게 불을 붙였나달려도 달려도 불은 떨어지지 않고, 개는무작정 또 달려오고(……)나는 우두커니개가 사라진 쪽을
말더듬이 염색공 사촌형은19년 퇴직금을 중동취업 브로커에게 털리고 나서자살을 했다(……)돈 1,000만 원이면내가 10년을 꼬박 벌어야 한다1억 원은 두 번 태어나 발버둥쳐도 엄두도 나지 않은강 건너 산 너머 무지개이다나의 인생은 일당 4,000원짜리그대의 인생은 얼마우리 사장님은 하룻밤 술값이 100만 원이라는데강아지 하루 식대가
그날동물농장에서보호소에 억류 중인유기견 한 마리작심하고 사람들을 향해쓴소리 한마디 내뱉었다컹! 짧은 시 속에 죽비가 들어 있다. 등줄기를 후려친다. 며칠 전 밤길을 걷다가 동물병원에 혼자 남은 강아지(마르티즈)를 본 적이 있다. 모두들 퇴근하고 없는 텅 빈 공간에서 출입문에 손발을 대고 잠긴 문을 향해 필사적으로 매달리
돌아서는 순간, 그러나내가 너와 반대 방향으로 계속 걸어갈 수 있을까너의 등을 볼 수 없는 세계로 발을 떼는 순간, 눈앞에는 아직까지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들로만 이루어진 세상,(-중략-)거대한 혹처럼 태양을 등지고 네가 내 앞에서 걸어오고 있다, 내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바로 너라고 생각하며 나는 똑 바로 걸어가고 있다거대한 화농이 터진 듯이 이
초저녁 별빛은 초롱해도 이 밤이 다하면 질 터인데그리운 내 님은 어딜 가고 저 별이 지기를 기다리나손톱 끝에 봉숭아 빨개도 몇 밤만 지나면 질터인데손가락마다 무명실 매어주던 곱디고운 내님은 어딜 갔나별 사이로 맑은 달 구름 걷혀 나타나듯고운 내 님 웃는 얼굴 어둠 뚫고 나타나소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 전에 구름 속 달님도 나오시고손톱 끝에 봉숭아 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