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다섯 개가 있다면 한 계절은 죽어 있어도 된다면 나는 너의 무덤에 있을 거야, 네 번째 계절이 끝나는 곳에 나무를 떨어뜨릴 거야 감정 노동자의 감정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리고 초록이 지겨운 초가을의 나무들을 닫을 수 있다면 다섯 번째, 다섯 번째, 자, 이렇게 시간은 흐른다,나무들이 맹목을 버린다면 우릴 쳐다보는 모든 눈동자들이 흰 자위만 남는다면
둥그렇게 어둠을 밀어올린 가로등 불빛이 십원일 때차오르기 시작하는 달이 손잡이 떨어진 숟가락일 때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손님이 욕할 때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 사는 사람을 볼 때(……)가게 평상에서 사내들이 술 마시며 떠들 때그러다 목소리가 소주 두 병일 때물건을 찾다 엉덩이와 입을 삐죽거리며 나가는 아가씨가술취한 사내들을
기억하는가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환희처럼 슬픔처럼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가끔은 굳어가는 심장을 뒤척여 줄 필요가 있다. 그럴 땐 ‘기억하는가’를 읽어보면 어떨까. 낙엽 바스러지는 소리가 패연(沛然)히 쏟아지는 빗소리로 들릴지
흰자위에 동동 떠 있는노른자 같은 마음아노른자를 둘러싸고 있는흰자 같은 마음아둘인 듯 하나인 듯 나누어지는두 개의 마음이 마음을 품어다시 한 마음이 생기려 할 때(……)구구구 어디론가 몰려가고 있는 어린 마음아쏟아지는 목청에 겨워 멀리서도 꼬끼오우는 마음아낳지도 않은 내 마음들이붉은 볏을 이고오지도 않은 새벽을 향해 한 발 두 발갸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벼랑꼭대기에 있지만옛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가까운 경주에도 독락당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독락당은 실제 거주 목적이기 보다는 마음의 집을 의미한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집이 있다. 그 중에 으뜸이 독락당이다. 독락당 안에는 좀체로 자라지 않는 어린
가장 낮은 곳에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그래도라는 섬이 있다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뇌출혈로 쓰려져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언젠가 강을 다 건
제 몸피의 반을 버려 삼만 리를 난다는 새삶의 반을 물속에서 살지만 물갈퀴를 키우지 않는 겸손은멀리, 높이 날기 위한 것칠게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부리는 더욱 길어야만 했고길어진 만큼 휘어졌으니말랑말랑한 땅 농사가 얼마나 질척대는지늪에 발을 담가본 사람은 안다갯벌은 어찌 그리도 집이 많은가(……)만경의 끝 심포, 맘껏 부리지 못한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놓여 있다 장롱이 그렇듯이오래 묵은 습관을 담은 채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나는 아내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돌아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helli
촛불을 켜면 면경의 유리알, 의롱의 나전어린것들의 눈망울과 입 언저리이런 것들이 하나씩 살아난다차차 촉심이 서고 불이 제자리를 정하게 되면불빛은 방안에 그득히 원을 그리며윤곽을 선명히 한다그러나 아직도 이 윤곽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있다.들여다보면 한바다의 수심과 같다.고요하다. 너무 고요할 따름이다. 초는 눈물이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화투를 친다광을 팔아야 하는지 내버리고 나가야 하는지서로 눈빛만 주고받는다삼광이 번쩍이는 형광등이 발발거리고아부지 언능 죽으세요 며느리 말에 발끈한 아부지시아버지한테 언능 저승 문턱 밟으라니 허, 참나내가 헛살았구먼 얼굴 벌게진 며느리가 말도 못 하고(……)넘어진 김에 코 박는다고 며느리한테 속 안 좋았던 것을화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동생을 돌보았다(……)아무도 그날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그대가 피는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꽃별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그대가 꽃 피는 것이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처음 이 시를 접한 순간 아득했습니다.남녀가 사랑하는 장면 이라는 편견 때문이었지요. 흔히 꽃은
달이 빌딩을 삼켰다가빌딩이 달을 뱉었다가 한다강을 건너고 내를 건넜던 기억그 기억조차 빌딩에 가려 어두워졌다고 하는데어두운 당신의 몸에서 달은 발이 닳도록 걸어다니는데(… 중략 …)이 밤, 잠 못 드는 당신은 찢긴 달,솜씨좋은 이야기꾼 할머니가새벽닭이 울 때까지 해진 달을 입으로 꿰매었다는아주 오래 전의 전설에 밤새도록 귀를 열어놓
“나는 어디서 왔어요, 엄마는 어디서 나를 주웠어요?” 아기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엄마는 반쯤 외치고 반쯤 웃으며 아가를 가슴에 껴안고 대답했습니다-“너는 내 가슴 속 소망으로 숨어 있었단다. 아가야.”너는 내 어렸을 적 소꿉놀이 인형에 숨어 있었고, 내가 아침마다 진흙으로 신의 모습 만들 때 나는 너를 만들었다 부수었다 했다.너는 우리 집안 수호신과 더불
누가 쪼개 놓았나저 지평선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저녁누가 쪼개 놓았나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상처와 상처가 맞닿아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캄캄하게 닫히네 -하
눈앞의 저 빛!찬란한 저 빛그러나저건 죽음이다의심하라모오든 광명을! 눈부신 시를 읽는 동안 머릿속에 집어등이 켜진 듯 했습니다. 오징어잡이 광경을 이처럼 찬란하게 보여주다니요. 생명이 망망대해에서 부표처럼 떠돌 때 한줄기 빛은 희망이자 죽음이기도 합니다. 캄캄한 어둠 속일수록 빛은 강렬한 유혹이지요. 내 안의 욕망으로
벌레들은 죽어서도 썩지 않는다우는 것으로 생애를 다 살아버리는 벌레들은몸 안의 모든 강들을 데려다 운다그 강물 다 마르고 나면 비로소썩어도 썩을 것 없는 바람과 몸을 바꾼다나는 썩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살아서 남김없이 썩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다풍금을 만나면 노래처럼 울고꽃나무를 만나면 봄날처럼 울고사랑을 만나면 젊은 오르페우스처럼죽음까지 흘러가
아내는 반홉 소주에 취했다 남편은 내내 토하는 아내를 업고 대문을 나서다 뒤를 돌아보았다 일없이 얌전히 놓인 세간의 고요아내가 왜 울었는지 남편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달라지는 법은 없으니까 남편은 미끄러지는 아내를 추스리며 빈병이 되었다아내는 몰래 깨어 제 몸 무게를 참고 있었다 이 온도가 남편의 것인지 밤의 것인지 모르겠어
가을 숲 빈 의자에내려앉은소식 하나형용사하나 없이느낌표와 말없음표하늘이 그리 곱던 날내가 받은 엽서 한 장 로 유명한 프랑스의 시인 레미 드 구르몽이 노래한 ‘낙엽’의 계절이 돌아왔네요. 가을바람에 우르르 몰려가는 낙엽을 보고 있으면 포르르 포르륵 먼지처럼 앉았다 날아가는 참새
가을바람에 떡갈나무 잎이 꿍 떨어지는데길가에 혼자 핀 민들레꽃 송이는하얀 꽃잎이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민들레야, 너는 어디로 갈거니?”“글세, 바람이 부는 데로 가지.”“나도 너를 따라 가고 싶어.”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새댁은먼 길을 떠날 수 있는 민들레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