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병영교회가 선교 120주년 기념예배를 보았다. 울산 기독교 역사에서 올해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울산에 복음의 씨앗이 처음으로 뿌려졌기 때문이다. 1895년 그때도 올 해와 마찬가지로 양띠의 을미년이었지만 세상은 어수선했다.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했고 일제가 조선 정부의 군사를 해산 시켜 울산에서는 오랫동안 이 나라를 지켜온
일본유학 후 귀국해 정유공장 근무하고 도정업 종사도형 택칠씨와 명촌염전 운영 재개했지만 큰 재미는 못봐염전부지 보상 놓고 현대車와 소송 벌이다 지난해 타계후손의 소금에 대한 열망은 여전…친목모임 명칭 ‘SALT’울산 사람들 중 개화기 선각자 추전 김홍조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의 동생 김홍규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조선조 말 명촌에서 염
백마부대 노래처럼 ‘정의의 십자군으로 깃발을 높이 들고’ 월남으로 갔던 김호경 소위가 유명을 달리한지도 50여년 가까이 되었다.그는 갔지만 그의 전설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병영초등학교와 울산제일중학교 친구들은 아직 그의 어린 시절을 얘기하고 육군사관학교 동기생들은 그의 무용담과 문학활동을 소개하면서 고인을 기리고 있다. 김 소위는 병영초등학교와 울산제일
김호경 소위는 1967년 2월7일 전사했다. 백마사단은 이에 앞서 1월29일부터 일주일 간 나트랑 북서쪽에 있는 흠바 산에서 1호 작전을 펼쳤다. 이 때 아군은 헬리콥터에서 공중투하되어 거목이 우거진 정글에서 무기고와 피복창고를 지키는 베트콩과 접전을 벌였다.이 전투에서 돌격대들이 50m 상공의 헬리콥터에서 로프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올 때 아군 한명이 베트
1943년 울산 중구 서원마을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병영초-제일중-부산고 거쳐 육사 졸업, 1년후 월남행큰형 진경씨와 친분 두터웠던 김홍일 장군 직접보면서호경씨, 군인의 꿈 키우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게돼자신이 월남서 전사할것 예감한듯 죽음 예고한 글 남겨 한국군의 월남 참전 역사서는 백마부대의 파월 역사를 이렇게 정리해 놓고 있다.‘1966년 9월16일
김 박사, 1920년 상북면 출신…의사로 울산서 활동어려운 농촌사회 조직적으로 지원해 줄 단체 구성로타리 초기 어려울때 두번이나 회장직 맡아 헌신1972년 회원 가입해 40년간 활동한 한시준 전 총재올해 50년사 편찬·기념행사·봉사사업 등 진두지휘 올해는 울산로타리클럽이 창립 이래 가장 바쁜 한해를 보낼 것 같다. 울산에 로타리클럽이 도입된 때
서울법대 출신으로 송철호와 함께 울산의 연수원 출신 변호사 개업 1호장인이 재산 소송 패소하자 항소 포기 권유, 공정분배 강조하던 삶 실천청대같은 삶 살았지만 애주가여서인지 2002년 50살 이른나이로 눈 감아지난해 울산 법원과 검찰이 신청사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노동계의 급작스러운 부상으로 지난 30여년이 혼돈의 시대였다면 신청사로 들
현재 공사중인 울산대교 아래로 정기 나룻배 왕래…이원득씨가 운영불바다된 마을 피난민·배 위에서의 사랑 등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스토리텔링 추진하는 양죽향우회, 당수나무·제당 보존 탄원서 제출새해 울산의 가장 큰 역사(役事)는 5년여 세월 끝에 완공을 보는 남구와 동구를 잇는 울산대교 건립이 될 것 같다. 그런데 해방 직후부터 70년대까지 현재 공사
태화동서 태어나 울산농고 졸업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함상 근무월남전 참전·해군본부서도 활동제독 승진 후 제3 해역사령관 발령중국 어뢰정 사건 침착하게 대처해한중 수교협상 시작하는 계기 마련 1985년 3월 발생한 ‘중국어뢰정 사건’은 사건 7년 뒤인 1992년 있었던 한중 수교의 가교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제3함대 사령관으로 일선에서
6·25후 매암동 양죽마을에 미군 주둔울산 도심의 학성여관도 미군이 점령배고프고 어린 심부름꾼들 모여들어술찌꺼기로 주린배 채우던 그 시절양죽마을의 하우스보이와 양공주는가정경제 지탱했던 우리의 형·누나 내년 6월 준공예정인 울산대교는 울산의 대 역사다. 이 다리는 사업비만 6000억원 이상 들었고 공사기간도 5년이 소요되었다. 울산 남구와 동구를 잇는 이 다
부산 출신 효주양 두번째 납치후경주서 풀려나 울산경찰소에서 보호유괴사건 둘러싼 당시 정황 소재로곽경택 감독, 영화 ‘극비수사’ 제작박 중구청장의 문화마인드 보답 차원울산 ‘친구2’에 이어 또 영화 무대로울산은 60년대 초 공업도시가 된 이래 노동자들의 메카가 되면서 노조운동과 관련된 각종 사건이 일어났고 이때마다 전국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70~8
설씨, 고교때 씨름선수로 체육계 활동50년 생애 울산체육회 발전에 헌신이철응 뒤이어 15년간 사무국장으로2015년이면 시체육회 창립 70년옛 발자취 정리, 새 체육사 발간해야지난달 이철응씨가 타계했을 때 울산에서 그의 죽음을 가장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보아야 했던 사회단체가 울산광역시체육회였다.이씨는 울산체육회 초기 사무국장으로 오랫동안 일했기 때문에 혼
1966년 2층 양옥으로 검소하게 건립우석 전성기 60~70년대 각계 문안인사에동네 어른들 대접으로 항상 문전성시농협장이었던 신종기씨가 30년간 관리10여년 전에 팔리면서 최근 건물 허물려 ‘육석정’이 50여년의 영욕을 뒤로 하고 철거되고 있다. ‘육석정’은 우석 이후락이 권좌에 있었던 1966년 건립되었다.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에 세워진 이 정자의
일본인들이 독식하던 전매서장직, 해방후 첫 한국인 서장 이승우씨가 맡아동구 남목 출신으로 울산초-대구고보 나와 해방때까지는 대구 전매서 재직전매서 조직을 한국인 위주로 전환…청빈하게 살아 경제적 어려움 겪기도그가 살았던 중구 학산동 울산전매서장 관사, 최근 헐리고 고층건물 들어서서울에는 경복궁과 창덕궁 등 왕궁이 있어 이곳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
범서읍 부잣집 출신 일본유학파 이관술귀국후 서울서 교사하면서 항일 선봉에혹독한 고문속에도 전향하지 않아 유명장생포 출신 노덕술은 고문왕으로 악명울산경찰서 순경으로 애국지사 괴롭혀둘다 ‘울산의 인물’ 선정 대상이었지만공산주의자, 친일파라는 이유로 제외돼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센터가 ‘울산의 인물’이라는 책자를 만들면서 그동안 말썽이 되었던 이관술과 노덕술을 최종
울산양조장서 근무하며 성실함 인정받아군에서 車정비 업무 배우는 특혜 얻어제대후 울산에서 車부속품 판매로 큰 돈태화호텔·태화관광·모드니백화점 건립울산상공회의소 7대 회장 취임했을때상의 남구 이전·울산 CC 개발에 큰 힘최근 경영난으로 태화호텔 ‘역사속으로’ 태화호텔이 건립 36년만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울산의 강남시대와 관광시대를 열었던 태화호텔 속에
20년대 울산 유명 한의사 아들로 태어나만주에서 일본군 측량 장교로 재직하다해방되자 울산으로 와 수학교사로 근무야마사백화점 무남독녀 최귀남씨와 결혼이때는 경제적으로도 부족함 없었지만후에 선거 낙선하고 사업도 연이어 실패지난 80여년 동안 울산인재의 산실 역할을 했던 울산공고는 해방 무렵에는 울산의 재능있는 교사들이 모여들어 울산에서 지성의 전당 역할을 했다
한쪽 다리 불편한 장애자였지만 똑똑하고 의술에 뛰어났던 설령씨추전 김홍조의 딸 천연두 고쳐주면서 인연 닿아 돈독한 관계 유지추전의 각종 사업에 참여하고 하상면장·수리조합 조합장 등 지내장남 두하씨 차남 근하씨, 아버지의 유업 받들어 큰 교육자로 성장일제강점기 추전 김홍조씨의 삶을 연구하다보면 당시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했던 또 다른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1800㎡ 2층 건물로 당시 최대 규모번화가였던 옛 울산초 앞에 세워져각종 회합 장소·숙박업소로 각광초기 주인은 스기야마였는데해방후엔 정억수-정현무씨 소유로현재 카페·사무실로 사용중울산 중구청 2층 복도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서상연 시인이 쓴 ‘그리운 울산’이라는 시가 걸려 있다.이 시에서 서 시인은 ‘지금의 울산교에서 태화강까지는/태화상회 학생사 조양백화
울산경찰서 발령으로 울산과 인연…4년 뒤 언론계로 이직1971년 울산도민체육대회 개최 돕기 위해 시체육회로 옮겨해방 전후 구전으로 전해오던 산하 단체 활동 정리해 출간울산상의 이직해 연감 만들기도…90세 일기로 지난주 영면우리는 지난 주 울산 현대사를 누구 보다 정확히 알고 있어 이를 증언해 줄 수 있는 귀중한 인물을 잃었다.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