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하려 여기 왔는가

 잠 못이룬 밤 지새우고

 아침 대동강 강물은

 어제였고

 오늘이고

 또 내일의 푸른 물결이리라

 때가 이렇게 오고 있다.

 변화의 때가 그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길로 오고 있다

 변화야말로 진리이다

 

 무엇하러 여기 와 있는가

 우리가 이루어야 할

 하나의 민족이란

 지난 날의 향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의 온갖 오류

 온갖 야만

 온갖 치욕을 다 파묻고

 전혀 새로 민족의 세상을 우러러보며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통일은 재통일이 아닌 것

 새로운 통일인 것

 통일은 이전이 아니라

 이후의 눈시린 창조이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 하러 여기에 와 있는가

 무엇하러 여기 왔다 돌아가는가

 민족에게는 기필코 내일이 있다

 아침 대동강 앞에 서서

 나와 내 자손 대대의 내일을 바라본다

 아 이 만남이야말로

 이 만남을 위해 여기까지 온

 우리 현대사 백년 최고의 얼굴 아니냐

 이제 돌아간다

 한송이 꽃들고 돌아간다.

  (전체 100행 중 처음과 끝 부분)

 

 대동강은 예로부터 이별의 공간이다. 사랑하는 벗을 보내는 눈물 때문에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강(정지상의 〈송인〉(送人))이거나 건너가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하는 강(고려가요 〈서경별곡〉)이다. 이 시는 "이별의 정서적 공간"인 대동강의 이미지를 "만남의 역사적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의 순안 공항에 도착한다.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인은 지구상에 하나 남은 분단국가의 종말을 바라면서 이 광경을 감격적으로 지켜보았다.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참가한 원로시인 고은씨가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이 발표된 14일 아침 숙소인 주암산초대소에서,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과 건너편 동평양 문수릿벌을 바라보면서 긴 노래를 읊었다.

 시인은 이날 저녁 평양시내 목란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주최 만찬석상에서 이 노래를 직접 낭독했다. 시인은 민족 통일의 절대적 당위성을, "가로막을 수 없는 진리"라고 목놓아 외친다. 나아가 민족 통일은 "재통일이 아닌 새로운 통일"이라고 민족사의 창조를 열망하고, 통일된 미래를 "한송이 꽃"의 피어남으로 확신한다. "한송이 꽃"은 통일이요, 창조된 새역사이다. 만남의 역사적 공간인 대동강에서 민족 통일의 꽃이 피어나기를 갈망하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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