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이후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이들 사이에 여러 가지의 기능을 갖춘 휴대용 컴팩트 카세트가 크게 유행했다.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도록 손잡이까지 갖춘 데다 하나의 기계 안에 라디오, 테이프, CD까지 죄다 들어 있었으니 그 인기를 가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휴대용 카세트의 다양한 기능은 그만큼 고장이 날 가능성도 다양하여 이내 고장과 수리의 쳇바퀴를 몇 번 돈 다음 선반 귀퉁이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게 되었다. 한 기계에 너무 많은 기능을 부여하면 부분적인 성능이 그 만큼 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우리 사회의 인력도 한 가지만을 깊이 파는 전문가[specialist]와 여러 가지 다양한 지식을 조금씩 골고루 갖춘 사람들[generalist]로 이뤄져 있다. 이 두 부류의 균형이 한 국가의 문화 수준을 반영한다. 요즘 우리 나라는 후자 부류가 판을 치고 있다. 내용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꾸려 가야 한다는 때문에 운영과 행정만을 중시하다보니 이제는 전문가 양성 자체에 문제가 생길 지경에 이르렀다. 전문가만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학조차도 교수를 채용할 때 한 가지에 뛰어난 전문가보다는 연구, 교육, 행정 모두를 적당히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 선진국의 대학들에서는 연구, 교육, 행정이 분리되어 균형 있게 발전해온 지 오래다.

 인 교수 임용기회와 한정된 예산으로 어렵게 대학을 운영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한 우리 학계와 사회는 효율적으로 발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세계 학계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점점 더 세분화된 전문가들을 요구하고 있다. 그 한 예로 지난 100년간 아시아 문헌, 문화, 언어의 연구에 주류를 이루었던 서구인들이 점차 들로 바뀌어가고 있다. 언어로 인한 학문적 교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문화내부인들의 전문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정보 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정보화시대에 보편적인 상식 수준의 지식만을 가지고는 더 이상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전문성을 간과하는 풍토는 결코 교육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나는 음악대학의 행정을 맡고 있는 터라 다른 문화예술기관의 장들과 함께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부서장들은 물론 실무를 맡고 있는 담당자들도 음악과 예술에 대한 배경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그나마도 간혹 몇 차례 일을 통해 서로의 전문성을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이뤄질 만하면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는 행정편의주의 인사제도로 의해 갑작스럽게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리곤 한다. 그 동안 내가 기획해온 많은 일들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늘 비전문가들의 이해를 촉구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며 우리 모두를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지난 50년간의 꾸준한 노력으로 우리 사회는 이제 축구와 영화 등의 분야에서 엄청난 약진을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의 오랜 노력의 결과를 확실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새로운 이미지가 온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이 때, 우리는 더 이상 열악한 가운데에서라도 어쨌든 꾸려가야 한다는 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학에서는 연구, 교육, 행정이 적절히 분리된 가운데 학교 운영과 교육이 균형을 이루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전문가들을 양성해야 한다. 사회는 사회대로 이렇게 양산된 전문가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