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후 9시15분께 운명을 달리한 고 김태호 국회의원(67·울산중·사진)은 내무부장관, 여당 사무총장 등을 지낸 4선 의원으로 울산정계의 거목이자 맏형이며, 울산이 낳은 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고인의 발자취와 빈소 분위기를 정리해본다.

 ◇성장과정과 성품= 1935년 1월21일(음력) 울산시 북구 천곡동 618번지에서 태어났다. 농서초등학교, 울산제일중, 울산농고(현 울산공고), 서울대 법학대학을 거치면서 친구들 사이에는 보스기질이 강하면서도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람한 덩치(키 182㎝, 체중 95㎏)에다 포용력있는 성격으로 남천(南泉)이란 아호와 함께 "항공모함"이란 별명도 있었다.

 바둑(1급)을 즐기고, 특히 불교계에 뿌리가 깊었던 고인의 생활신조는 "분수를 지키자, 최선을 다하자"는 것으로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면서도 한편으론 평범하기를 원했다.

 평소 고인과 가깝게 지내온 지인들은 그를 "중후한 인품"의 소유자라고 평한다. 한 측근은 "온화하면서도 진솔했고, 말로써 표현은 없어도 마음은 한없이 따뜻했던 분이었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주요 경력과 공적= 군복무 뒤 관료의 길을 택한 고인은 41세되던 지난 76년7월부터 78년2월까지 인천시장을 지낸 이후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 내무부 지방행정연수원장을 거쳐 81년7월 내무부 차관보에 이어 82년1월 대통령 정무2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됐다.

 83년10월부터 13개월간 경기도지사를 역임했고, 85년 첫 도전한 제12대 국회의원선거(울산·울주)에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한 뒤 13·15·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3대 국회의원 시절 내무관료시절 전문성을 인정받아 89년7월부터 90년3월까지 내무부장관을 역임했고, 불교계와 각별한 인연으로 국회 정각회 회장과 민자당 불교신도회 초대회장 등을 지냈으며, 14대 총선때 국민당 돌풍으로 11표차이로 낙선한 뒤 93년12월부터 95년5월까지 불교방송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5대 총선으로 재기한 뒤 신한국당 사무총장을 맡아 당시 꼬마민주당 사무총장이던 고향후배 이규정 의원과 함께 합당으로 한나라당을 탄생시키는데 주역을 했고, 초기 한나라당 사무총장으로 97년말 대선때 선거대책본부장을 역임했다.

 그의 주요 공적으로는 지역출신 거물 정치인으로서 △도심을 가로지르던 철도의 외곽 이설사업 △환경오염이주사업 △울산대공원 일대 그린벨트 해제와 공원조성 △번영교 등 각종 도로·교량사업 등의 추진과 △광역시승격과정의 핵심역할 등이 손꼽히고 있다.

 또 내무장관시절 자정이후 심야영업 규제, 자율이었던 학생 교복 착용, 경찰 순찰차 도입과 범죄와의 전쟁 선포 등이 회자되고 있다.

 ◇조문행렬=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영안실에는 타계직후부터 조문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중앙인사로는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가 11일 오후 3시30분께 10여명의 의원들과 함께 찾는 등 이날 오후 8시 현재 약 100명의 국회의원, 이한동·이홍구 전 총리, 조계종 정대 총무원장 등 각계 지도자들이 조문했다.

 지역인사로는 세대교체를 주창한 고인의 직·간접적 후원을 입은 박맹우 시장과 김철욱 시의장, 권기술·최병국·윤두환 국회의원, 고원준 상의회장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

 김대중 대통령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조화를 보냈는데 전전대통령 등은 12~13일께 조문할 것으로 전해졌다. 송귀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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