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을 감싸고 있는 산 가운데 하나인 신불산(神佛山·1209m)에서 발원한 맑은 물도 울산사람들의 삶을 적시며 태화강으로 스며든다.

 신성하고 밝은 산이라는 뜻을 가진 신불산은 6부능선 쯤에 마을사람들이 "찬물샘"이라 부르는 샘물을 안고 있다. 지금도 등산객들에게 식수가 되고 있는 이 찬물샘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물방골 어름골 큰골 작은골 등을 감싸안아 들내라는 큰 하천을 형성한다. 좋은 물은 좋은 논밭을 만들기 마련. 내(川)는 들(野) 한 가운데로 흘러 산아래에 들내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넓은 옥토를 조성한다. 자연스럽게 들판 주위로 사람이 모여들어 가천리(加川里)를 이루었다.

 가천리는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덜내. 덜내는 들내의 변한 말이고 이를 이두로 표기하면서 가(加)에 ㄹ(乙)을 더해 가을천(加乙川)이라 했고 이두사용이 사라지면서 부르기 쉽게 두자로 줄여 한자로 표기한 것이 가천(加川)이다.

 가천리에는 원마을인 가천(加川)을 비롯해 공암(孔岩), 강당(講堂), 지내(池內), 금사(金獅) 등 5개 행정마을로 구성돼 있다. 가천과 강당마을은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자연 마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반면 공암은 농공단지로, 금사와 지내는 삼성SDI(삼성전관)라는 큰 기업에 의해 변해버린 마을이다.

 가천과 공암은 15년여 전만해도 한마을이었다. 들내들을 끼고 있어 농사를 지으며 땅이 주는 식복에 따라 살았던 이 두마을은 세상 흐름과 함께 입장이 뒤바뀌었다. 농토가 넓은 가천은 부자마을에서 그저 먹고 살만한 동네로, 도로를 끼고 있던 공암마을은 공장이 주택보다 더 많아지면서 큰 부자들이 속속 나왔고 지금은 신흥도시 처럼 젊은 사람들이 많은 큰 마을이 됐다.

 가천마을은 신불산 아래 첫 동네다. 신불산 아래 작은 봉우리 고장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신불산 골짜기의 찬물샘이 그대로 마을로 이어진다. 들판을 앞으로 하고 빙둘러 산쪽으로 집들이 서있다. 15년여전부터 공장지대로 변하기 시작한 공암마을을 분동시킨 뒤 대가천 소가천 2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다. 모두 80가구에 230여명이 배·논농사와 축산업 등으로 살고 있다.

 가천마을 윤찬수 이장(47)는 "모두가 농사만 지어 먹고 살 때는 가천하면 누구나 부자동네라고 인정했다"며 "학교에서도 쌀밥 도시락 싸오는 애들은 모두 가천 애들이었다"고 말했다.

 들판과 마을 사이에 도로가 나있고 들판을 바로 바라보는 마을 한가운데 마을 회관과 우물·빨래터가 조성돼 있다.

 이 우물은 가천마을의 상징이자 자랑거리다. 상수도가 생기기 전에는 이 작은 우물물은 온 동네 사람들이 죄다 가져다 먹는 식수였다. 지금도 이 우물은 그대로 떠 먹어도 되는 물이다. 빨래터의 인기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수남 할머니(82)는 "보리쌀 씻을 시간이 되면 온동네 아낙네들이 죄다 몰려들어 엉덩이 놓을 자리도 없었어"라며 "여름에서 손이 시리도록 차고 겨울에는 김이 술술 올라오는 훈기가 있어 손 시려운 줄 모르고 빨래를 했지"라고 회상했다.

 어디든 자연마을이 그렇듯 가천마을에는 노인이 많다. 물이 좋은 덕인지 노인들이 모두 건강하고 장수하는 편이다. 91세 된 노인이 2명이나 있는가 하면 80세된 노인들은 아직도 농삿일을 하고 있다. 경로당에 나오는 노인들만도 50여명에 이른다.

 김흥태 할아버지(80)는 "올해는 묵혀 놓은 논 1천300평을 경로당에서 짓기로 했어"라며 "논을 갈아 모를 심기까지 많이 힘들었지만 경로당 식량도 하고 혼자사는 어려운 노인들도 도와줄 걸 생각하면 힘이 나"라고 말했다.

 소가천은 대가천에서 작은 산모퉁이를 하나 돌아서 들어가면 나온다. 작은 마을이지만 마을 앞으로 큰 못이 있고 뒤로 산을 끼고 있다. 재실 두채가 단연 눈길을 끈다. 박씨 재실이 아래에 있고 송씨 재실이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박씨 재실이 먼저 들어섰는데 그 뒤 일제때 높은 자리에 있던 송태관씨가 송씨 재실을 그 위에 만들었다고 전한다. 박씨재실은 어디서나 보던 재실이지만 송씨 재실은 어마어마한 규모다. 산 위로 성을 쌓듯 석축을 쌓아올리고 계단을 두세차례 꺾어 돌아야할 만큼 높다랗게 터를 조성하고 그 위에 건축물이 덩그러니 올라 앉아 있다.

 공암마을은 가천마을 아래 쪽 마을이다. 가천과 공암사이에는 공장만 있고 주택은 국도를 끼고 양옆으로 발달돼 있다. 공암이라는 이름은 마을에 구멍이 난 큰 바위가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마치 공장(工場)이 많다하여 붙여진 이름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은성전자, 주식회사 유영, 럭키실업, 민영화학, 세종화학, (주)일삼 등 제법 큰 중소기업들이 들판을 많이 잠식했다. 이들 공장은 15~10년 전에 들어섰고 이로 인해 토박이들은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기도 했다.

 올해 60여년 마을을 지키고 있는 권씨(60)는 "그 때 땅값이 7배 이상 뛰어 농사 많은 사람들은 한보따리 건져서 도시로 나갔는데 잘됐다는 말이 들리는 사람은 별로 없어"라며 농사짓고 사는 현실에 자족했다.

 공암에는 논을 전용해 새로 들어선 주택들이 즐비하고 젊은 사람들이 많다. 주민이 시골마을로서는 꽤나 많은 편인 355가구에 1천105명이나 되지만 토박이는 별로 없다. 대개가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이다.

 공암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가천을 큰 마을이라거나 부자동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0여년 세월에 강산이 변한 것이다. 글=정명숙기자 jms 사진=김동수기자 dskim@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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