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알프스의 맹주격인 가지산의 좌·우 계곡 물이 합해지는 곳에 백년노송으로 둘러싸인 천년 가람이 바로 석남사다. 고승단좌형(高僧端坐形)의 명당길지 위에 자리 잡은 비구니 수도도량이다. 가지산을 석안산으로도 불렀고 그 산의 남쪽에 있는 절이라 하여 석남사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같이 사찰과 산이 서로 이름을 주고받는 경우가 흔히 있다. 순천 송광사는 당초에 송광산 조계사였다가 조계산 송광사로 바뀐 경우이다.

 석남사는 신라 진평왕 49년(627)에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건하였는데, 그 시초는 신라 아달라왕의 영신타령소(影愼妥靈所)에서 출발했다. 영신타령소는 영정을 봉안한 아달라왕의 묘당이란 뜻이다.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今西龍)의 〈신라사연구〉에 의하면, 신라의 박씨족은 경주의 서남부 쪽으로 발전하였는데, 박곡(朴谷), 박달(朴達), 열박재(悅朴峴), 우박천(禹朴川·경주시 외동읍) 등의 지명이 이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주민도 박씨가 주를 이루었기에 박씨왕인 아달라왕의 묘당이 가지산에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본다. 그 후 석남산 아달라왕의 묘당 옆에 불당이 생겼는데, 〈언양읍지〉는 "석남사가 본래 아달라왕의 영신타령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석남사는 청도의 운문사, 공주의 동학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비구니 사찰이다. 석남사에는 23동의 건물이 있으며 1천명 스님의 밥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다는 엄나무구유를 비롯하여 부도와 석탑 등 중요한 문화재가 많이 남아있다. 일설에는 영남에서 제일 큰 절이라는 뜻으로 석남사(碩南寺)라 하였다고도 한다.

 중국 선종에 달마의 첫 비구니 제자로 총지(聰持)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5년 전 입적한 영일 출신의 원허당 인홍선사가 있다. 석남사 주지로 있었던 20년 동안 대웅전, 극락전을 중건하고, 정수원 선원 등 법당 9개 건물을 중수하는 등 도량의 면모를 쇄신하였고, 말년에는 대한불교 전국비구니계 총재까지 역임했다. 어릴 적에는 여자아이들과 놀기보다는 남자아이들과 전쟁놀이를 즐겼다는 그녀, 인생무상을 통감하고 자주 추연한 비감에 젖었던 소녀가 마침내 대가람의 주지가 되어 해탈의 고행 길에서도 당탑가람의 중창이라는 큰 족적을 남긴 것이다.

 비구름이 짙게 깔린 가지산 자락의 석남사 강선당. 오늘도 또 다른 총지와 원허당을 바라며 학인스님들의 깨달음을 향한 발걸음이 쉼 없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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