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성동은 정유재란과 관련하여 역사성이 깊다. 선조 29년(1596), 임진왜란 후, 일본과의 화의교섭이 깨어지자,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이듬해 재침략 명령을 내리니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가또오 기요사마(加藤淸正)는 서생포에 대군을 주둔시켰고, 직산·소사에서 대패하고 후퇴한 나베시마의 군대와 함께 옛 계변성 위에 새로 쌓기 시작한 도산성(島山城)은 임란의 판도를 바꾼 최후의 승부처였다.
직산대첩에 힘을 얻은 명군은 울산의 왜군을 공격할 목적으로 45,000의 군사를 이끌고 남하, 12월 23일부터 울산의 도산성을 공격했다. 그즈음 축성의 대가인 가토오가 쌓은 왜성인 도산성은 이미 거의 완성단계에 있었다. 조명군(朝明軍)은 먼저 축성중이라 성밖에 야영하던 왜군을 섬멸하고 이어서 성을 물샐틈없이 포위하여 식수원을 차단한 뒤에 포격과 화공(火攻)을 맹렬히 가하였다. 열흘이 지나자, 성안의 왜군은 혹독한 추위와 바닥난 식량과 싸워야 했고, 성안에 우물이 없는 치명적 결함에 따라 마실 물이 없어 오줌이나 말의 목을 쳐 생피로 목을 축일 지경이 되었다. 해가 바뀌어 1월, 구로다 나가마사와 나베시마 등의 응원군이 차차 가세하여 왔고, 때마침 큰비로 조명군의 인마(人馬)도 많이 얼어 죽게 되자 부득이 포위를 풀고 1월 4일 경주(慶州)로 철수하고 말았다.
대승을 거둔 대첩은 아니나 일본이 왜란을 철저히 후회하게 만든 13일간의 혈전이 이로써 끝이 났다. 구마모토로 돌아간 가토오가 구마모토 성을 축성하면서 성안에 우물을 120개나 파고, 다다미 뒤에 말린 고구마 줄기를 얽어서 굶주림에 대비하게 하였다 하니, 그가 도산성 전투에서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나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일본은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지난 4백년간 구원(舊怨)에 얽힌 두 나라가 선린의 관계로 회복되기를 원하고 있다. 과거지향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함께 아시아의 미래를 일궈나가려는 의지를 보인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