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결정짓는 마감시간의 중요성
자연 섭리에서 수용· 순응의 자세를

언양 남천의 여름, 키 큰 포플러 나무그늘에서 낮잠에 취하던 시절이 있었다. 반세기도 더 된 옛날이다. 그 기억은 늘 매미소리로 시끌벅적하다. 매미악단의 상설 공연장인 냇가의 포플러나무들은 매미소리의 양기를 얼마나 들이마셨던지 저마다 신불산과 키를 재며 8월의 뭉게구름 위로 솟구친다. 그 푸짐한 그늘을 덮고 엮어가는 한여름 낮의 꿈조차 매미들의 함성을 따라 절정에 오른다. 전 세계의 매미들이 죄다 모여 한목소리로 노래한다. 온 몸을, 아니 온 생명을 한 점 남김없이 쏟아 부은 열창이다.

매미들은 절대로 여름을 두 번 구하지 않았다. 가을을 넘보는 매미 역시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성충이 된 매미는 열흘정도 살다 죽는다. 길어야 한 달이다. 삶의 마감시간이 임박했으므로 그들은 그토록 뜨겁게 울었을까.

마감시간은 그것을 지켜야 하는 쪽에서 바라보면 추상같은 절대자다. 그 앞에서 모든 산 것들은 너나없이 가련하다. 사람들이 더욱 그렇다. 기자들은 원고마감에 쫓기고 생산업체는 납품마감을 맞추려 툭하면 밤샘 작업이다. 출근시간, 약속시간, 휴가후의 귀대시간, 시험 종료시간을 지키려고 시계침을 연방 기웃거리는 시선들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생활인의 일상사에서 마감시간의 관리는 예삿일이 아니다. 때로는 그 관리의 성패가 인생 전체의 성패를 결정한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객관적 마감시간 말고 스스로 설정하는 마감시간도 있다. 이 '주관적 마감시간'은 더 사람을 피 말리게 한다. 애연가들의 흡연기간과 금연시점은 저마다 다르다. 필자는 두 해전에 40년 이상 즐기던 담배를 끊었다. 끽연의 마감시간을 한없이 뒤로 미룬 결과였다. 매우 비장한 결심으로 담배 갑과 라이터를 인천공항의 흡연실 재떨이에 버리던 순간이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고향에서 보낸 세월을 왜 좀 더 길게 늘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희망과 두려움, 그리고 석별의 정에 잠 못 이루던 고향의 마지막 밤들을 평생 지니고 산다. 고향생활 마감일의 서늘한 가슴은 휴가 마지막 날의 이등병의 속마음과 닮은꼴이다. 그래도 아리고 쓰리기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머무르는 시간의 마감만한 것이 있을까.

사안에 따라서는, 마감시간이 몹시 중요한 것인 줄 알면서도 정작 최적 마감시간이 내일인가 내년인가를 몰라 애태우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때'를 가리는 일이다. 정오와 황혼에 구애받지 않고 물불 가리지 않는 노익장이 있는가 하면 일찌감치 스스로 전을 거두는 조퇴파도 있다. 주관적 마감시간의 개인차가 이만큼 크게 벌어지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주로,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의 편차가 그 차이를 만들 것이다.

사람이 정한 마감시간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지엄한 마감시간이 있다. 이승 체류의 마감이 그것이다. 고향을, 어머니를, 마지막 직장을, 배우자나 애인 곁을 떠날 때의 온갖 마감들을 다 합쳐도 그 양과 질과 차원과 무게가 삶의 마감 같지 않을 터이다.

두 번의 여름을 구하지 않겠다며 매미들이 기를 쓰고 울어대는 언양 남천의 8월은 참 편한 언어로 순응과 수용의 섭리를 속삭인다.

이 종 대 전 대우자동차 회장·서울

(그 옛날 울산토박이들은 태화강을 '태홧강'이라고 발음합니다. 맑고 아름다웠던 그 '태홧강'은 울산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입니다.

칼럼 '태홧강'은 울산을 떠나 다른 도시에 살면서도 가슴 한켠에 울산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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