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높고 맑은 하늘이 벌써 계절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 그 길고 지루했던 무더위도 서서히 물러가고, 새삼 세월의 속도를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계절이다.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아름답게 보이고, 처자식의 건재함이 고맙고, 고향과 옛 친구들이 그립게 느껴진다. 흔히 말하기를 배우자, 건강, 경제력, 친구, 취미 등이 행복한 노년을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라 하는데 정말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나에게 이런 친구가 있는지 생각해 보다 떠오르는 한 친구가 있어 오늘은 그 친구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는 언제나 변함없이 믿음직하고 편한 친구다. 철없던 10대에 만나 강산이 5번이나 바뀌는 긴 세월 동안 우정을 나누어 오면서 단 한번도 섭섭한 마음을 느껴본 적 없는, 너무나 마음이 편안하고 믿음이 가는 친구다. 젊은 시절에는 서로의 꿈과 미래에 대해 수많은 대화와 편지를 주고 받았으나, 요즈음은 자주 만나거나 심지어 전화통화를 자주 하는 편도 아닌데, 친구가 고향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덥고 편하게 느껴지는 사이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구순의 부모를 극진히 모시며, 가정의 화목과 행복이 인간사의 가장 큰 기쁨이라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친구들에게도 아주 헌신적이다. 친구의 일이 마치 자기 일인 양 생각하는 사람이다. 고향에 일이 생겨 오랜만에 연락을 해도 귀찮은 기색 없이 열심히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그래서 그는 항상 바쁜 편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하는 세태, 배 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오늘의 인심과는 한참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는 염치를 알고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언제나 자기 스스로를 낮추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함은 물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행동하는 사람이다. 남의 작은 선의에도 고마워할 줄 알고 신세를 갚으려고 노력하며, 온화하고 겸손한 표정과 말로 주위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든다. 남 달리 뛰어나거나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는 한결 같은 성실함과 꾸준한 노력으로 모범을 보이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 우리의 물질적 생활은 풍족해졌지만, 세상 사는 맛이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각박해진 인심을 느낄 때가 많다. 사람들은 점점 영악하게 변하고, 정직하게 원칙대로 살면 자기만 손해 보는 바보라고 생각한다. 요즘 사람들은 눈 앞의 이익을 취하는 데는 밝아졌을지언정 인생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눈은 점점 어두워 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세태 속에 항상 변치 않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감동받는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들 세상 사는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순간적인 자극을 주는 인공조미료 같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오래 묵은 된장 같은 친구를 가진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자랑, 마누라자랑, 자식자랑을 하는 팔불출에 친구자랑을 하는 것도 포함된다면, 난 기꺼이 팔불출이 되련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그를 만나 소주라도 한잔 나누어야겠다.

양승만 건국대 초빙교수 경제학 박사·서울

(그 옛날 울산토박이들은 태화강을 '태홧강'이라고 발음합니다. 맑고 아름다웠던 그 '태홧강'은 울산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입니다. 칼럼 '태홧강'은 울산을 떠나 다른 도시에 살면서도 가슴 한켠에 울산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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