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관련된 어떤일이 있을 때마다 떠오르는 격언이 있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단지 불편할 따름이다”. 정말 서민들에게는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돈과 관련된 직업에 오랜기간 종사해온 사람으로써 돈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항상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가난이라는 단어는 재산이 없음을 말하고, 재산이 없음은 돈이 없다는 말로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돈에 대해 청렴하기를 강조해 왔으며, 특히 최근 총리임명 과정에서도 이런 문제가 그 어느 때 보다 많이 부각되었었다.

 그러나 최근 베스트 셀러에 올랐던 책 중에 기존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주장을 편 책들이 있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과 “부자들이 들려주는 돈과 투자의 비밀” 등 마치 책 제목만 읽더라도 돈들 벌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 책이다. 이들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된 이유는 아마도 돈 이야기라면 어쨌든 읽고 보자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들 책 속에는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가난한 아빠는 “돈을 좋아하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라며 “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을 구하고, 돈은 안전하게 사용하고 위험은 피하라”고 가르치는 반면에 부자 아빠는 “돈이 부족한 것은 악의 근원”이라고 하면서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회사를 차리고, 위험을 피하가 보다는 관리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너도나도 돈 돈 하는 것을 보면 이른바 금융지능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등장시키면서 돈의 지배를 받기 보다는 돈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하는 이와 같은 지론이 각광을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 때문에 허덕이고, 중산층은 돈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면, 부자란 돈을 부리는 금융지능을 지난 사람들일 것이다.

 프랑스의 현대사상가인 엘룰이 쓴 “하나님이냐 돈이냐”라는 책이 시사하듯이 돈은 이미 신과 동격적인 위상에서 양자 택일적 비중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을 더 부정하기 힘들다. 비록 엘룰은 그의 저서에서 “돈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길은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어 거저 주는 삶을 실천하는 길” 이라고 했다. 돈을 어떻게 모을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자선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 현실은 가치 상실로 인해 돈을 통한 소유와 소비의 무한한 행진을 즐기려 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즐기는 정도를 넘어서 소비와 욕망 분출을 위한 광기를 점점 노골화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즐길 수 있는 동안 즐기자’는 이기적 쾌락주의와 결탁하여 문명의 진보라는 이름으로 탈 도덕화를 부추기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과 타인의 행동을 달리 판단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내가 어렵게 번 돈 어떻게 쓰든 상관이 없고, 다른 사람들이 윤리 도덕적으로 문제 있게 돈을 쓰면 나쁜 행동으로 치부되고 있다. 한마디로 내가 하면 로멘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다. 최근 집중 호우와 태풍의 피해를 바라볼 때 진정으로 돈을 잘 쓸 수 있는 기회가 온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언론 매체를 통한 수해 현상을 보면서 스스로 은행 창구를 찾아와 상당한 금액을 불우이웃돕기 성금 계좌에 입금하면서, 한사코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를 꺼리는 사람과, 단돈 1,000원의 적선을 위해 다이얼을 돌리는 사람, 신문사와 방송사 등을 통해 성금을 자발적으로 내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고 한다. 천재지변을 바라보며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불행이라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국가의 재난이 오면 음주가무를 일정기간 중단시킨 사례도 있다. 이기적인 쾌락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답게 돈을 쓸 것인가 하는 돈을 쓰는 방법을 생각해 보면 돈이 인간에게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하는 명제에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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