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에 대한 폭행이 또 저무는 한 해를 어지럽힌다. 이번에는 폭행의 주체가 어른이 아닌 초등학생이란다. 점입가경이다. 교사를 폭행하는 학생 가해자의 학령이 낮아지는 것도 문제지만, 폭행의 빈도가 잦아져 잊을만하면 신문 지면과 TV 화면을 장식한다. 선생님이 친구들 앞에서 망신줬다고 학생이 달려들고, 학부모는 내 아이 기죽였다고 폭행, 게다가 사회여론의 뭇매질까지 가해져, 교사가 자신감을 가지고 설 땅은 교육 현장 어디에도 없다.

어디 물리적 폭행만 폭행인가? 자녀 앞에서 교사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제자에게 당하는 폭행 이상으로 존경심을 떨어뜨리고, 매년 오월 매스컴들이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촌지 타령은 교권을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물리·정신적 폭행을 당하며 교권이 추락해온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90년대 '수요자와 공급자'라는 경제 용어의 교육계 유입 이후부터 학교를 바라보는 학부모의 눈이, 일반 사회인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업 경영 마인드를 교육력 향상에 접목시키려는 의도였을테지만, 교권 추락이란 작금의 상황에 이르게 한 부정적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수요자의 다양한 요구 사항들이 공급자의 정당한 교육권보다 목소리가 커져, 교육 현장의 긍정적인 장면들은 묻혀버리고, 부정적인 장면들만 클로즈업 되고 있다. 게다가 탈권위주의 시대의 도래로, 교육현장의 교원들도 특별 우대받는 기득권 층으로 일부 수요자들로부터 분류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국가 권력으로부터 탄압받던 인권이 회복되어 만병통치약 격의 인권적 해석이 교육적 판단에 우선하다보니, 정상적인 학생 생활지도도 위축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런 분위기 속의 선생님들의 초라한 실루엣은 어린 수요자들에게까지 가르치는 위치를 우습게 보게 하기에 이르렀고, 근엄해야 할 교육을 계급장 떼고 한판 붙는 삭막한 탈권위의 광장으로 내몰아, 교사의 사기 저하는 누적되고 있다.

교사는 사기(士氣)를 먹고 가르친다고 했다. 70년대의 산업화의 열풍 속에 초임교사의 월급이 시내버스 안내양의 수입보다 못했을 때도 학부모 사회의 '우리 선생님'으로 믿어주는 분위기에 떠밀려,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단을 지키면서, '군사부일체'라는 어휘에 기대 교사들은 허기진 자존(自尊)을 가누어 왔다.

오늘날의 학교 현장은, '무명 교사 예찬'이 교사들만의 장단인 웃기는 노래로 수요자의 폄훼 속에 희화화된지 오래이고, 교사는 학부모로부터 시중 학원의 강사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는 현실이다. 학교 교사가 매를 들면 인권문제로 비화되고, 학원 강사에게는 오히려 체벌을 요청하는 서글픈 희극이 연출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옛날처럼 긍정적으로 보아주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있는 그대로 한 직업으로서의 교직으로 대접해 달라는 것이다. 담임의 일거수 일투족을 내 아이 사기와 관련된 잣대로 눈금을 읽으려 하고, 교사들의 이유있는 항변을 철밥통의 배부른 소리로 치부해버리려는 의식이 존재하는 한, 폭행당하는 교사는 계속 생겨날 것이다.

또 교사들의 사기 저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교사의 사기가 살아나야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의 사기도 같이 살아나고, 교육력이 향상되어 희망적인 미래를 가꿀 수 있다. 한강의 기적을 창출한 근대화의 산업 요원도, 엄혹한 권위주의를 몰락시킨 민주화의 기수도 모두 열악한 환경을 감내해낸 교사들의 눈물겨운 의욕 속에서 키워냈음을 상기하자.

저물어가는 이천육년의 세모에, 사면초가의 칠판 앞에서 명분(名分)에 목마르고 외로움에 몸을 떠는 그들을 조금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강굉래 약사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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