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늦은 밤 우연히 TV를 켜니 시끄러운 모터소리와 콸콸거리는 물소리가 범벅이 돼 있는 가운데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었다. 강의 수질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시도라는 설명에 저런 식으로 강의 물을 퍼내다니 정말 무모한 짓이라는 생각을 하며 잠을 청했다. 그런데 조금 있으려니 남편이 옆에서 "야, 대단하다!" 하며 감탄사를 쏟아내는 게 아닌가. "울산이야기인데 태화강의 수질이 좋아져 수영도 할 수 있대."

울산이라는 소리에 다시 벌떡 일어나 앉은 나는 우쭐거리며 울산이니까 할 수 있다는 식의 '울산예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시 잠을 청하기는 다 틀린 것 같았다. 내 마음은 이미 정신없이 춤을 추며 울산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서울에 두고 온 가족을 한 시도 잊지 못하며 보낸 울산 생활 5년이 어느덧 내 가슴 한 켠에 추억의 멍을 만들어 버린 것일까.

어느 계절이든 서울에서 내려와 울산 공항의 문을 나설 때 내 코끝을 싱그럽게 하던 이른 아침의 그 싱싱한 공기, 그 공기를 마시며 울산대학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탁 트인 논과 언덕 위 자그마한 집들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나도 이 곳에 작은 집을 짓고 싶다는 꿈을 꾸던 기억이 새롭다. 대학 교정에 들어서면 마치 미국 어느 작은 도시의 대학처럼 단아하고 질서정연한 외양이 무언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것 같은 희망을 품게 했다.

이따금씩 들리던 태화강변의 고깃집. 고기를 시켜 놓고도 갑자기 갈치가 먹고 싶다고 하면 주저 없이 구워주셨던 넉넉한 마음의 상냥한 여사장님. 항상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내 구두발자국 소리를 기억하곤 집에서 직접 만든 만두를 쑥스럽게 건네주던 아래층 젊은 엄마. 가족이 그리워 징징거릴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함께 밥을 먹으며 온갖 즐거운 얘기로 마음을 달래 주던, 스스로 당신을 병영깡패라 부르시던 옆 건물 선배 선생님. 그 곳이 얼마나 따뜻한 곳인지 그 때는 미처 몰랐다.

나의 울산 생활은 울산의 모든 것을 다 체험하기에는 너무나 짧았다. 하지만 울산 시의 가장 열악한 부분인 문화예술 분야를 위해 열심히 뛰던 울산 시 공무원들과 음악을 사랑하는 시민단체의 사람들을 만나며 나는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자 하는 젊은 도시 울산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다. 오랜 전통과 역사의 관행과 관례에 묶여 변화하기 어려운 우리 문화권의 많은 도시들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들이 울산에서는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래서 내게는 태화강의 소식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얼마 전 내가 초창기부터 몸담았던 울산대학교 음악대학 제1회 졸업생이 유럽에 유학하여 국제 콩쿠르 입상 등의 놀라운 실적을 쌓고 돌아와 지난 가을부터 음악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듣고는 뛸 듯이 기뻤다. 지방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의 음악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는 큰 꿈을 안고 탁월한 교수진을 확보하여 1998년에 시작한 울산대학교 음악대학은 다른 모든 부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던 울산의 문화예술 향상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예술문화가 발전하려면 장기간의 무조건적이며 지속적인 관심과 투자가 필수적인데 우리 사회는 여전히 성급하게 결과만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 역시 울산이니까 가능하다고 믿고 싶다. 장기적으로 치밀한 계획을 세워 과감히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고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 언젠가 울산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산업도시라는 새로운 명성을 얻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태화강의 수질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도시니만큼 문화 환경도 끈기와 의지로 바꿔갈 것이라 믿는다. 템즈강이 아니라 태화강의 수상음악을 듣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채현경 이화여대 교수·음악학

(그 옛날 울산토박이들은 태화강을 '태홧강'이라고 발음합니다. 맑고 아름다웠던 그 '태홧강'은 울산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입니다. 칼럼 '태홧강'은 울산을 떠나 다른 도시에 살면서도 가슴 한켠에 울산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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