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만 해도 '울산의 노래'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동해나 울산은 잣나무…'로 시작하는 민요 <울산 아가씨>를 배웠고, 라디오에서는 연일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 애기…'라는 대중가요가 울려 퍼졌다. 당시에는 어머니 합창단을 비롯하여 아마추어 합창단이 전국적으로 대유행을 하였는데, 어느 합창단이건 <울산 아가씨>를 시대적 감각에 맞게 편곡하여 아름답고 감칠맛이 나게 부르곤 하였다.

음악을 전공하면서부터는 언양의 미나리를 노래한 가곡 <물방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귀야 귀야 담바귀야 동래 울산의 담바귀야…'로 시작하는 <담바귀 타령>도 애창을 했던 기억이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 전통음악 가운데 불후의 명곡으로 손꼽히는 <수제천>이 처용무의 반주음악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마치 큰 보물이라도 발굴한 것처럼 흥분했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타지에서 살면서 많이 받아 본 질문 가운데 하나가 고향이 어디냐는 것이다. '울산이다' 하면 상대방이 대뜸 '아, 경치도 좋고 인심도 좋고 큰 애기로 유명한 신흥 공업도시 울산에서 왔구나'라는 반응이다. 울산출신이라고 하면 그 말 자체가 상대방에게 호감과 친숙함을 주는 것이었는데, 이쯤 되면 노래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아마 이런 경험은 나만 한 것이 아닐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울산의 노래가 듣기 어려워졌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요즘에는 '울산 출신'이라고 하면 '아, 그 노사분규와 공해로 유명한 곳'이라는 반응이다. 울산의 이미지가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그것도 부정적으로…. 그때마다 음악이 직업인 나는 '울산의 노래가 많이 불려야 할 텐데'라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하면 울산의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애창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실, 울산은 지리적으로 산과 들,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농악을 비롯하여 각종 민요가 발달할 수 있는 요건을 두루 가지고 있다. 또 풍부한 자연과 넉넉한 인심은 각종의 연희문화와 풍류문화를 발전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런 울산에서 수많은 노래들이 만들어졌고 많은 사람들에게 향유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농업과 어업의 현장에서는 각종의 노동요를 불렀을 것이고, 자연과 더불어 산천경계를 노래하면서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가정에서는 모든 노래와 정서의 근원이 되는 '자장가'를 불렀을 것이고, 청춘남녀는 '사랑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또한 시집살이의 외로움과 서러움을 담은 노래도 있었을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이별가'와 '상여소리'를 부르면서 정든 임을 떠나보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는 일제에 저항을 하는 노래와 함께 조국 광복의 희망을 담은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노래들을 당대에서 잃어버리고 만데 있다.

'과거가 햇볕을 쬐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신화가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그 많던 '울산의 노래'가 햇볕과 달빛은 고사하고 별빛도 받지 못하고 있다. 역사에도 없고 신화로도 존재하지 않으며 살아 있지도 않고 박물관에도 없는 것이다. 다만, 어딘가 깊은 곳에서 깊은 잠만 자고 있을 뿐이다.

<울산 아가씨>가 그랬듯이 과거의 노래를 발굴하여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어 준다면, 새로운 예술의 역사가 만들어질 것이고 새로운 신화도 만들어 질 것이며, 무엇보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일조를 할 것이다. 그리고 애향심과 함께 '문화예술 생산의 도시'라는 이미지도 보너스로 줄 것이다. 예술이란 결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유(有)를 바탕으로 새로운 유(有)를 만드는 것이다.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그 옛날 울산토박이들은 태화강을 '태홧강'이라고 발음합니다. 맑고 아름다웠던 그 '태홧강'은 울산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입니다. 칼럼 '태홧강'은 울산을 떠나 다른 도시에 살면서도 가슴 한켠에 울산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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