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식을 한 달쯤 남겨둔 1964년 겨울. 그러니 43년 전 일이다. 그때 나는 오랜만에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게 되어 친구들과 배내골도 가고 가지산 등반도 했다. 집에서 울산까지 태화강 강줄기를 따라 걸어서 가기로 했다.

고향이 울주군 상북면이니 언양을 거쳐 울산 학성공원까지는 60리 길. 캄캄한 새벽 도시락을 넣은 색 하나만 달랑 어깨에 멨다. 석남사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따라 걸었다. 울산으로 가는 국도는 그 당시 좁은 2차선으로 차가 마주치면 한 대는 한참 멈춰 있어야 할 정도로 좁은 자갈길이다. 향산마을 아래의 청룡끝에 이르자 물이 모여 소(沼)를 이루어 빙빙 돌았다. 중학시절 여름이면 우리들이 멱을 감던 곳. 겨울인데도 시퍼런 물이 빙빙 돌아나가는 모습이 별빛에 어른거렸다. 화장산 서쪽 끝 봇디미에 이르자 서북쪽 운문재를 넘어온 찬 바람에 귀가 아렸다. 언양 서부리 방천미기를 지나자 희붐하게 날이 새고 있었다. 언양읍 남천 다리 곁을 지나고 미나리꽝이 많은 어음리를 지나면 곧 부엉새가 운다는 부엉디미다. 부엉디미에 이르자 강 건너 우뚝선 문수산에 아침 해가 비쳤다. 다정한 나의 외사촌형이 사는 장촌, 가난한 고모가 사는 공촌을 지났다.

중학시절 일요일 고모집에 가서 외사촌과 고종사촌을 따라 반송 마을 앞 태화강에서 송어, 탱가리, 지름챙이, 중태기, 궁자(민물장어)를 잡았던 기억이 새롭다. 반천과 살소마을을 지나면 도로는 절벽 아래로 나 있고 오른 쪽엔 시퍼런 강물이 흘렀다. 그곳은 벼락디미라 불렸다. 사연에 이르면 고헌산에서 흘러내리는 대곡천과 태화강 본류가 만나게 되어 맑고 푸른 강물은 그 수량이 많아졌다. 선바위 입구를 지나 굴화에 이르자 맑은 강물은 유유히 흘렀다. 아침나절 따사한 햇살 탓인지 등에 땀이 배었다. 태화강은 삼호산을 오른쪽에 끼고 강변에 대밭을 이루며 울산만으로 흘러들었다.

강변 대밭은 시퍼런 강물과 도로 옆의 산과 어울려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시켰다. 굴화를 지난 뒤 허허벌판인 삼산들을 오른쪽에 끼고 태화교를 건넜다. 우정동을 거쳐 학성공원에 이르니 정오가 지났다. 공원에서 도시락을 챙겨 먹고 나니 짧은 겨울 해는 어느덧 뉘엿거렸다. 야음 쪽에서 울산공업단지를 조성하느라 굴삭기들의 굉음이 들렸다. 피곤하여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려다 사나이 결심을 실행해야지 하고 왔던 길을 다시 걸었다. 돌아올 때는 길이 좀 짧아 보였다. 언양에 도착하자 캄캄한 밤이었다. 화장산 봇디미를 지나 집에 도착하니 밤 9시가 되었다. 그날 나는 하루에 120리를 걸었다.

그 일주일 뒤 이번에는 반구대를 거쳐 옹태마을을 경유하여 사연으로 가는 울산길을 택했다. 우리 집에서 못안마을의 큰못을 지나 태기를 거쳐 반구대까지는 이십 리. 반구대는 중학(언양중학 9회) 때 소풍을 갔던 곳. 정몽주의 비각이 있고 서원이 있고 이름다운 바위절벽이 있는 곳. 사연댐 공사도 시작하지 않았던 때이어서 지금의 암각화 아래에서 잠시 쉬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분명 그 암각화를 보았지만, 그냥 누군가가 옛적에 바위에다 물고기와 짐승을 새겨두었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뿐이었다. 징검다리를 몇 개 건너 한실 마을 앞을 지나고 옹태마을 앞에 이르니 푸르고 맑은 강물이 출출거리며 흘러서 징검다리는 큰 바윗돌로 되어 있었다. 얼음 때문에 징검다리를 건너다 미끄러져 고생께나 한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강인수 소설가 부경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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