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향 장생포를 찾았다. 고향을 찾을 때마다 부두의 확장으로 철거되고 없는 집터를 찾아 그 곳에 서서 맞은편 용잠반도를 바라본다. 삼림으로 뒤덮였던 용잠반도였건만 그저 황량하기 그지없다. 초등학교 시절 막내 고모를 따라 전마선을 타고 맞은편 내해마을에 내려 용잠초등학교 운동회 구경을 가는 도중 울창한 삼림으로 뒤덮인 용잠산 속에서 여우를 보고 무서워 막내 고모의 손을 꽉 잡고 어쩔줄 몰라했던 60년 전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때는 고래도 많이 잡혔다.

우리집은 장생포에서 할아버지 때부터 유일하게 고래 삶는 집이었다. 넓다란 부두에 대형 고래솥 서너 개를 걸어놓고 매일 밤낮으로 고래 고기를 삶았다. 삶은 고기는 간이 위판장에 널어 기름이나 국물을 빼고 즉석에서 팔거나 울산 읍내장으로 보내 판매했다. 때문에 고래잡이가 시작되는 6월부터 10월까지 우리집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고래 상인들로 법석을 떨었다. 동네 아이들도 고기 삶는 것을 구경하다가 상인들이 잠을 자는 틈을 타서 위판장에 널어놓은 살코기를 먹어치우곤 했다. 상인들도 이러한 아이들의 행동을 보고도 모른 체했다.

이때 6·25 전쟁이 터졌다. 우리집에는 삼척, 울진, 강구, 구룡포에서 온 피난민들로 붐볐다. 이들은 우리집 부두 마당에 자리를 깔고 생활을 시작했다. 그래도 고래는 매일 많이 잡혔다. 그때는 일본과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아 수출길도 막혀 있었다. 때문에 무조건 국내에서 소비해야 되는데 고래 고기를 잘 먹는 지역은 울산과 부산, 대구밖에 없어 소비가 되지 않아 값이 폭락했다. 팔리지 않은 고래 고기는 자연히 동네 아이들 차지였다. 동네 아이들은 허기진 배를 고래 고기로 채웠다. 고래 고기를 삶고 난 뒤에는 가마솥에 많은 기름이 남게 된다. 그 기름은 식용과 배나무의 병충해 방제용으로 팔려나갔다. 그때 배나무 밭은 장생포 초등학교 뒤편에서부터 야음동까지 주거 지역만 빼고는 대현면 전체였다.

고래가 많이 잡힐 때, 동네 청년들은 해마다 부두 창고에서 연극을 공연했다. 수협 창고에 가설 무대를 꾸미고는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 연극을 했다. <항구의 일야〉 〈홍도야 울지 마라〉 등의 신파극은 피난민들의 애환을 달래 주었다. 지금은 유명한 스포츠 중계방송의 아나운서가 되어 명성을 얻고 있는 MBC 출신의 송재익 아나운서도 당시 장생포에 피난와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 후 송재익 아나운서는 장생포를 잊지 못해 수시로 남모르게 장생포를 찾아와 피난 시절 살던 집을 보고가곤 했는데 이젠 그 집도 철거되고 없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휴전이 되고 피난민들도 한집 두집 떠날 때였다.

장생포에는 태화강 하류 마을인 내황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내황 사람인데 장생포가 고래잡이의 전진기지화될 때인 1890년대에 내황에서 배를 타고 태화강을 따라 장생포로 이사와서 고래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밖에 고래사업으로 성공했던 몇몇 사람들과 수산업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내황 사람들이 많다. 장생포에 고래잡이 전진기지를 제일 먼저 확보한 나라는 러시아였고 그 다음이 일본이었다. 그 당시 울산 읍내와 장생포 간의 육로 교통은 무척이나 불편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고래가 잡히는 장생포에 가면 돈 번다는 소문을 듣고 태화강 하류 내황에서 조개잡이 전마선을 타고 장생포로 모여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보면 태화강과 장생포는 인연이 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태화강의 강물이 흘러 내려와서 울산만 입구에서 한 줄기는 동해와 합쳐지고 한 줄기는 장생포항으로 흘러 들어간다. 때문에 태화강 유역 개발 사업은 장생포를 포함할 때 완성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삼일 대경대 교수·경산

(그 옛날 울산토박이들은 태화강을 '태홧강'이라고 발음합니다. 맑고 아름다웠던 그 '태홧강'은 울산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입니다. 칼럼 '태홧강'은 울산을 떠나 다른 도시에 살면서도 가슴 한켠에 울산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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