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근정리는 예종(睿宗) 때는 임이리(숲이리·林伊里), 정조(正祖) 때는 수피리(禾皮里)라 하여 하북면에 속한 마을이었다. 일제 때인 1911년 우만(于萬) 화촌(禾村) 궁근(弓根)의 세 마을로 갈라져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궁근정리라 하였다. 궁근정리에는 장성(長城)과 궁근정 두 행정마을이 있다.

 궁근정은 옛날 이곳에 화살나무과에 딸린 회나무가 정자(亭子)를 이루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또는 활과 살을 만들고 군졸들이 이곳에서 훈련하였으므로 궁근정이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궁근정을 "굵은 정"(太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곧 이 지역에 굵은 정자나무가 많았으므로 "굵은 정"이라 한 것이 지금의 궁근정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신라시대 군정(軍停)이 있었던 곳으로 보기도 한다. 운문재 석남재와 함께 이 지역이 경주 도성을 방어하는 요충지이므로 군사조직인 "정(停)"을 두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궁근정 주변의 지명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궁근정 앞산의 장성(長城), 활쏘기를 했던 궁평(弓坪), 말을 길렀던 마두배기, 진을 쳤던 흥진(興陣), 연병장이던 사시야(射矢野), 상징적인 과녁(貫革: 활 쏘는 목표물)이던 시암(矢岩), 과녁을 세워 두었던 삽재(揷峴), 장사(壯士)들이 살았다는 우마니, 화살을 만들던 살구정(살구이정), 화살 재료를 만들던 살티(矢峴)등 군대와 관련한 지명들이 도처에 남아 있다.

 옛날 궁근정에는 주막도 있었고 객주도 있었으며, 색주가도 있었다 한다. 청도 대구 영천 경주 등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궁근정은 처음 오랫동안 군영지(軍營地)로 있다가 뒤에 정(停)이 이전해 가고 활과 화살만을 만들던 고장으로 조선조까지 전해왔던 곳이며, 거기다 3대 도로의 갈림길이요 언양 서부의 현관이므로 석남원(石南院)을 여기에 두었던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목표를 빗나가는 것을 "죄"(罪)라고 했다. 전투에서 주무기(主武器)인 화살로 사정거리에 근접한 적을 제대로 맞히지 못할 경우 그것은 곧 바로 나와 동료병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된다. 나의 불찰로 인해 다른 사람이 생명을 잃고 재산피해를 입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큰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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