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병이지만 의학이 발전하지 않은 19세기에는 산모들이 분만 뒤 생기는 감염질환인 산욕열로 많이 죽었고, 또 큰 고생을 했다.

1840년대 말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산부인과 병원에서 일하던 헝가리 의사 젬멜바이스(Ignaz Philip Semmelweis, 1818-1865)는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분만하는 산모들이 뚜렷한 교육 없이 경험만으로 근무하는 조산원들이 돌보는 산과 병동에 입원하기를 원하며, 그 이유가 학문적으로 충분한 교육을 받은 의사들과 의과대학생들이 돌보는 병동에서 산욕열로 인해 죽는 산모가 더 많아 입원하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충격을 받은 젬멜바이스는 이야기를 흘려 듣지 않고 그 원인을 찾아 조사한 결과, 산욕열이나 패혈증으로 사망한 임산부를 부검하는 자리에 있었던 의사나 의과대학생들이 바로 산과 병동으로 가서 분만을 거드는 경우, 진찰을 하는 의사나 학생들의 깨끗하지 않은 손이 산욕열을 옮기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산모의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분만실에 근무하는 의사들이 병동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염소화석회수에 손을 씻고, 손톱 틈을 솔로 문지르도록 지극히 간단한 조치를 취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의사들과 의과대학생들이 돌보는 병동의 사망률은 그 해에 9.9%에서 3.8%로, 그 다음 해에는 1.3%까지 감소하게 되었다. 젬멜바이스의 위대한 발견은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사실을 '왜'라는 질문을 하고 문제점을 찾아 개선하고자 하는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고 '왜'라는 질문과 관찰을 한다면 의외로 쉽게 개선할 수 있는 일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사소한 변화에서 획기적인 약진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기업 경쟁력에 필요한 창의력과 혁신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젬멜바이스는 이 같은 실적을 바탕으로 확신을 얻게 되자 오염된 손으로 진찰을 계속하는 산과의사들은 살인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맹렬히 비난하였고, 이러한 그의 성급한 태도는 선배 교수들의 심한 반발에 부딪혔으며, 결과적으로는 재임용 탈락과 같은 핍박을 초래하게 되었다. 고향 부다페스트로 돌아가 성 로쿠스 병원의 산과 과장이 된 그는 1861년, 무균처리가 산욕열로 인한 사망률을 감소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는 내용의 '산욕열의 원인, 개념과 예방'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빈에서의 주장을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논문을 유럽의 주요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발송하여 의사들을 통해 병이 감염된다는 사실을 알리려 하였지만, 그의 이론에 거부감을 느낀 산부인과 의사 대부분이 이를 무시하였다. 무시당한 젬멜바이스는 계속해서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알리려 했고, 그의 태도는 산부인과 의사들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상대하기에 너무나도 독불장군식으로 받아들여져 자신들의 과거의 잘못을 인정해야만 하는 입장에 서게 된 산부인과 의사들은 집단으로 젬멜바이스의 이론에 대해 완전히 무시하는 입장에 섰다.

결국, 젬멜바이스의 이론은 그가 죽고 세월이 지난 뒤 세균학자들에 의해 입증되었지만, 정작 자신은 생전에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사사회의 경멸과 악평 속에 그 부담을 이겨 내지 못한 채 말년에 정신병을 앓다가 47세에 빈의 정신병원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젬멜바이스가 자신의 옳은 주장을 그 당시 의사들에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타인들에게 강요하는 대신 연구를 진행하여 점진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했어야 했다. 자신의 주장이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틀렸다고 몰아 세워 반감을 갖게 한다면 자신의 주장 역시 펼 수 없게 된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는 동물이 아니므로 나와 생각이 다른 부류를 무시하고 혼자 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인내심과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

젬멜바이스를 통해 우리는 관찰력과 탐구력 못지 않게 '인내심과 포용력'도 성공을 위하여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건임을 명심하여야 하겠다.

박상규 울산대학교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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