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에 현대자동차를 퇴직했으니 벌써 8개월이 지나가고 있다. 여자가 시집을 가서 기를 펴려면 친정이 잘 돼야 하듯이 남자에 있어 직장은 친정과도 같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정년을 맞아 회사를 그만 두었지만, 현대자동차의 평생사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현대자동차가 잘 되기를 바라고 있다.

뒤돌아 보면 정말 세월은 빠르게 지나간 것 같다. 현대자동차 한 직장에서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이 훌쩍 지나갔으니 말이다. 1977년 부산에서 함께 직장생활을 하다 먼저 현대자동차에 입사한 분으로부터 "현대자동차에 가면 돈벌이가 괜찮으니 울산에서 같이 일 좀 해보자"고 해서 입사한 것이 정년퇴직을 하게 됐으니 개인적으로 후회없는 직장생활을 했다.

당시 낯설고 물 설은 타향객지 울산생활을 시작하면서 배고픔은 참을 수 있었지만 배우지 못한 한(恨)은 참기 힘들었다. 가난한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 싶고,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많이 배우지 못한 부모가 자식만은 공부를 많이 시키려고 하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 나는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노력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것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남을 배려하고 배우는 자세를 잃지 말자'는 나 자신과의 다짐과 약속을 존중하며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한 가지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던 기억은 직장생활 동안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생각하건데 그렇게 열심히 배우고 일한 덕분에 30년 직장생활을 명예롭게 마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을 현대자동차에 다니면서 다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자식들이 공부를 하고 싶다면 크게 말리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너무 무리해가면서 공부시킬 필요가 있느냐며 걱정해주는 분들도 많았지만, 나는 뒷바라지에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현대자동차라는 든든한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에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나는 현대자동차에 다니는 동안 자식 3명에다 막내 동생까지 4명 모두를 대학까지 졸업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회사에서 학교 등록비를 지원해주었기 때문이다. 막내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던 2001년 봄, 이미 미대와 음대에 다니고 있는 두 딸의 등록금까지 합치니 준비해야 할 돈이 무려 1000만원이 넘었다. 3명의 등록금 1000여만원을 한꺼번에 입금하고도 우리 부부는 돈 걱정을 하지 않았다. 다음 달이면 회사가 급여와 함께 등록금도 지원해 주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 평생 회사와 집밖에 모르고 살았다. 솔직히 어쩌다 쉬는 날이면 딱히 갈 곳도 없었다. 그래서 퇴직 후 지금의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고 행복하다. 명예롭게 회사를 퇴직한 것도 개인적으로 큰 축복이었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도 정말 후회 없는 청춘을 보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변함없이 현대자동차를 선택할 것이다. 내게 현대자동차는 내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현대자동차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퇴직 후 현대차 노조가 파업을 너무 심하게 한다는 비난을 정말 많이 듣고 있다. 현대차 노사는 무분규 타결을 바라는 시민들의 염원을 결코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현대차 임직원들의 노력 못지않게 국민들과 울산시민들의 성원도 회사 발전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현대자동차가 세계 1위의 자동차회사로 우뚝 설 때까지 영원한 후원자가 되겠다. 강태영(60·남구 야음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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