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68년 설국(雪國)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일본에서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 설국은 1937년에 처음으로 발표한 이후 12년 동안 여러 차례 다듬고 고치면서 1948년에 비로소 완결판을 내게 되었는데, 마치 분재를 정성스럽게 키우고 다듬은 것같은 느낌이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에 이 설국에 나타난 일본식 표현들은 당대 최고의 예술적 성취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섬세하고 서정적이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무렵에서 표현된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라는 문구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듯이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로 시작되는 소설의 첫대목은 일본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구절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광양에 있는 한국컨테이너공단을 방문하기 위하여 남해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광양항으로 가면서 문득 설국의 첫구절이 생각났다. 잘 계획된 광양항의 모습 속에서 항만과 비항만과의 대비, 그리고 울산항과 광양항과의 대비를 통해 지금껏 보아온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느낌을 그만큼 강하게 받았다.

인터체인지에서 7~8㎞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광양항은 컨테이너전용도로가 건설돼 있어 신호등 하나 없이 불과 5분정도면 부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다를 매립하여 지금까지 건설된 5.1㎞의 직선부두에는 거대한 컨테이너크레인들이 부두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무역항임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광양항은 늘어나는 컨테이너 물동량을 적기에 처리하기 위해 1987년부터 부산항과 함께 양항(two port)정책의 일환으로 순차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올 9월에는 3단계 5만곘급 4개선석을 개장함으로써 총 16개 선석에 550만TEU의 처리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부두로부터 폭이 600곒에 이르는 컨테이너 야적장과 그 너머로 조성될 약 120만평 규모의 배후부지는 울산(배후부지 17만평)과 비교해서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광양항은 충분한 항만인프라가 구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비어 있고, 일부는 수출용 자동차의 야적장으로 임시 사용하고 있었다. 광양항의 모습에서 양항정책의 그늘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았다. 실제로 올 7월까지 광양항에서 처리한 실적은 97만TEU정도로 연말까지 200만TEU에도 못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550만TEU의 처리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말이다.

울산으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울산은 전국에서 부산과 인천 다음으로 처리물동량이 많다. 전국 액체물동량의 35%를 처리하는 중요한 산업항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울산신항에 대한 투자는 양항정책의 영향으로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 그 결과 전국 7대 신항 중 광양항은 공사 예정 금액의 약 73% 상당이 투자된 것에 반해 울산은 겨우 15%대(지난해 기준)에 머물러 전국 꼴찌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체선율도 꾸준히 높아져 2005년의 4.7%이던 것이 2006년에는 5.7%로 높아졌다. 이는 전국 평균 5%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올해 울산지방해양수산청은 울산신항의 건설을 위하여 약 1600억원의 예산을 신청했으나 1400억원만 배정됐다. 유휴설비가 늘어가는 항만과 체선율이 늘어가는 항만 중에서 투자의 우선순위가 어디인지는 누가 보더라도 자명하다. 당장에 체선율을 줄이는 문제도 시급하지만 울산항이 울산에 미치는 경제적 파급효과가 37%나 된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적절한 예산의 배정을 위해 관계 공무원은 물론 모든 울산 시민이 힘을 모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심규명 울산항만공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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