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환 박사가 필자의 처용설화 해석에 대하여 반박하는 글을 기고한 바 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반박이다. 송박사는 필자의 처용설화에 대한 해석을 '외설론'이라고 부르면서, 이는 잘못된 학문적 근거에 기초하기 때문에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필자의 처용설화 해석의 논거를 처용설화가 신라왕실의 문란한 성풍속이 반영된 외설이고, 처용설화는 무속신앙적 요소가 많아 종교적 편향성이 있다는 두 가지로 압축한다.

어떤 학자의 입장을 비판하려면 먼저 그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이해가 필수적이다. 위의 두 가지 사실은 처용문화제가 울산시의 대표축제로서 부적합하다는 주장에 대한 논거이지, 처용설화의 외설성 주장에 대한 논거가 아니다. 필자의 주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다.

송박사는 처용 외설론이 박인희 교수의 '신덕왕 등극설'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허구라는 것을 입증하면 외설론도 타당성을 잃게 된다고 강변한다. 그는 문원(박교수의 처용설)이 울산의 호족세력이고 그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면, 울산의 지방세력이 중앙세력을 물리치고 권력을 장악한 특이한 사건이어서 신라사 전공자들이 거론했을 것이지만, 그런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송박사의 주장은 일방적이다. 필자는 처용가가 성애적 표현이라는 사실, 그리고 헌강왕 시대와 그 이전의 신라왕실에서의 성풍속에 비추어 볼 경우에 그것은 단순한 문학적 비유가 아닌 실제 사건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박인희 교수의 처용 해석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보았다. 박인희 교수의 가설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므로 쉽사리 무너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필자의 처용 해석은 박인희 교수의 학설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예겸 혹은 문원의 아들인 경휘가 912년에 신라 제52대 신덕왕으로 등극한 것은 뒤집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예겸은 중앙귀족이고 헌강왕 때 시중 벼슬을 지냈으며, 나중에 효공왕에게 딸을 왕비로 내주었던 막강한 권력자였다. 그러나 문원이 누구이고 어디 사람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박인희 교수가 문원을 울산 호족세력으로 상정한 것은 가정이고, 그의 처용 문원설 역시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필자는 그의 가설을 선별적으로 수용하였다. 김부식 이후의 역사서가 신덕왕을 예겸의 아들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울산호족에 의한 왕권장악설은 제기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처용설화의 외설적 해석의 핵심은 일연스님이 망해사를 신방사(新房寺)라고 불렀던 사실과 헌강왕이 사냥구경을 하면서 한 여인과 관계를 가져서 서자 요(효공왕)를 낳았던 사실에 있다. 이 두 기록이 동일한 사건인가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료는 없다. 두 기록의 정합성을 고려하여 하나의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겸과 문원의 관계 역시 추정된 것이다. 송박사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과 그것들에 근거한 논리적 추정 사이를 혼돈하는 것 같다.

송박사는 신덕왕의 아버지 예겸이 삼국유사 왕력편에 의부(義父)로 나와 있는 사실에 근거하여, 문원이 죽은 후 정화부인이 예겸에게 개가(改嫁)한 것으로 보고 박인희 교수의 예겸 역신설을 부당하다고 말한다. 그는 고려시대의 의부 개념을 예겸의 경우에 그대로 적용하여 문원이 사망한 후 정화부인이 예겸과 재혼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예겸이 정화부인의 간부(姦夫)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송박사의 주장 역시 확증적 사료에 근거하지 못한 하나의 추정일 뿐이다.

송박사는 '의부'라는 문자 해석에만 집착하여 더 큰 오류를 범한다. 의부라는 말이 반드시 개가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개가하지 않은 상태에서 색공의 자식을 양자로 인정했던 신라시대의 마복자(摩腹子)와 가자(假子) 개념 역시 의부의 범주에 속한다. 비처왕은 색공 벽아부인의 아들 위화랑을 마복자로 받아들였으며, 진흥왕은 색공 미실이 세종에게서 낳은 하종을 아들로 삼았다. 이들 사이의 부자관계는 모친의 개가를 전제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 진 울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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