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환 박사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예겸이 신덕왕 경휘의 의부라고 인정할 경우에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박씨문중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게 되는 것이다. 신덕왕 경휘가 예겸의 직계가 아니라면 문원의 자식일 것이고, 그 경우 문원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박씨왕가의 혈통에 중대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김창겸 박사는 '신라하대왕위계승연구'에서 송박사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예겸이 김씨라고 본다. 일연스님은 문원이 박씨라고 확실하게 기록하지 않았으며, 경휘의 어머니 정화부인의 조부만이 박씨 성을 가진 제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최치원 선생은 아달라왕에게는 후손이 없다고 하였으며, 김부식 역시 '삼국사기'에 그렇게 기록하였다. 부계가 아닌 모계가 아달라왕의 후손이라는 기록, 그리고 아달라왕에게는 후손이 없다는 기록, 그리고 예겸이 박씨가 아닌 김씨라는 학설 등은 신덕왕의 왕통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다. 송박사의 의부 개가설은 결국 박씨문중의 세보를 부정하게 된다.

송박사는 박인희 교수의 처용=문원, 처용처=정화부인, 역신=예겸 가설에 대한 필자의 추론이 사료에 근거하지 않은 가정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그리고 필자가 외설론을 정확한 사료로써 입증하지 못하는 한 허구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역사학자를 자처한 송박사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한다. 처용설화와 관련된 사료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고, 이처럼 사료가 불충분한 고대사 연구의 경우에 불연속적인 틈새를 합리적인 추론으로 가설체계를 만드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아무런 근거 없이 처용가의 외설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처용사건이 일어난 헌강왕 초기에 시중 벼슬을 지내던 예겸이 갑자기 실각한 사실, 진성왕이 숙부인 각간 위홍이나 미소년들과 탐닉한 사실, 화랑지도자였던 효종 대신에 헌강왕의 서자 요가 진성왕의 후계자로 지명된 사실, 그리고 예겸이 딸을 효공왕비로 보내고 아들 경휘를 헌강왕의 딸과 혼인시킴으로써 이중적인 결속을 유지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닌 것이다. 특히 처용사건과 관련하여 일연스님이 신덕왕의 계보를 상세하게 적어놓은 사실도 무시될 수 없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은 진흥왕 이전의 사료나 <화랑세기>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신라왕실의 성풍속, 특히 근친혼, 색공, 마복자, 어색, 삼서제 등과 닮은꼴이다.

송박사는 신라왕실의 성풍속은 왕통과 골품을 유지하는 수단이므로 당대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필자 역시 같은 입장이다. 필자는 예겸과 문원과 정화부인의 관계가 그 이전 시대의 성풍속과 다를 바 없으며, 이것이 바로 처용가에 표현된 그대로의 상황일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그 시대의 성풍속 자체가 도덕적으로 문제된다고 비판한 것은 아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처용가의 외설성을 울산시의 대표축제로 기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지적했을 뿐이다.

송박사는 도화녀 비형랑 설화와 헌강왕의 마복자 사건에 대하여 필자가 도발적인 해석을 통하여 사료를 왜곡한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지적은 그가 역사학자로서 정치한 감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지왕의 혼령이 도화녀를 찾아서 비형랑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정도의 식견이라면 더 이상 언급할 가치가 없다. 그러나 헌강왕이 사냥 중에 여인과 관계를 맺어서 서자 요를 얻었다는 기사는 <삼국사기> 진성왕조에서 확인된다. 왜곡이 아니라 사실인 것이다.

처용가가 외설적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처용연구가들이 시인한다. 처용추진위측이 12월 3일의 심포지엄에 초청한 인사들조차도 역신을 중앙집권세력이라고 규정하였다. 그 시대의 집권세력 중에서 처용사건에 가장 근접한 인물은 바로 예겸이다. 박노준, 김경수, 김학성 교수들과 같은 처용전문가들도 외설성을 인정하는데, 왜 송박사는 필자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설익은 식견을 뽐내는지 알 수 없다.

김 진 울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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