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리는 고종 정조 때까지 서생리라 하였다가 고종31년(1894)에는 북동(北洞)과 남동(南洞), 1911년에는 성내동(城內洞)과 외리동(外里洞)이라 하였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서생리(西生里)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생포 왜성을 일명 외증성(外甑城)이라 한다.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을 증성(甑城-시루성)이라 하는데서 그 대응으로 외(外)를 붙여 외증성이라 하였을 것이다. 시리성 또는 시루성·실성이라 하는 것은 성의 형태가 시루를 엎은 것 같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시루성이 있는 산이라 하여 시루성산이라 하다가 이것이 줄어서 실성산이라 부른다.

 실성산의 산신을 ‘앙금할망구(老姑)’라 부른다. 옛날 원시사회의 사람들은 산에서 살았고 산에서 채집하고 산에서 먹고 살아야 했으므로 산의 신을 섬기게 되었다. 또 땅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을 산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신이 땅으로 내려오는 곳도 산정이며, 그 첫발을 내리는 곳도 곧 산정이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산의 신령을 믿어 그 신령의 가호를 받으며 식량 등 생활의 풍요를 빌어 왔다. 실성산의 앙금할망구가 바로 이런 신이다.

 실성산(甑城山)의 앙금할망구는 증성산에 진좌(鎭坐)하여 아침에는 승강어적(勝江漁笛)을 들으며, 선도귀범(仙島歸帆), 폭포비설(瀑布飛雪), 증성낙조(甑城落照)를 바라보면서 성암모종(聖庵暮鍾)에 하루가 감을 아쉬워하였다. 또 밤이 되면 층대명월(層臺明月) 아래 도독숙로(都督宿露)를 밟아본다. 때로는 신암(新岩)의 신선바위에 몸을 날려 갈매기 떼와 벗하고 서호의 임금산에 놀다 찌개바위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런데 앙금할망구에게는 소중히 간직해 온 반지가 하나 있었다. 이 반지는 고래 떼가 남극으로부터 돌아오면서 선물로 드린 산호반지였다.

 하루는 앙금할망구가 서생성의 대장단(大將壇)에 올라가서 동해의 파도와 어울려 지나가는 뱃길을 보살피다가 옆에 빼두었던 반지를 잃어 버렸다. 쥐 한 마리가 오래간만에 돌 틈에서 나왔다가 이상한 것을 보고 물어 가버린 것이다. 할망구는 크게 놀라 법석을 떨며 두 손으로 땅바닥을 마구 파헤치며 반지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대장단(大將壇)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손으로 땅을 파헤친 다섯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 온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금반지를 끼는 사람은 투명인간이 되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그리고 니벨룽겐의 반지는 라인강 바닥 돌 틈의 황금으로 만들어지는데 이 반지 역시 손에 지니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의 앙금할망구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울산 앞바다의 뱃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잃어버린 반지를 다시 찾았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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