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를 통하여 오늘을 반성하고 미래를 향해 더욱 발전해 가자는 데 뜻이 있다. 과거의 잘못된 역사도 엄연한 역사이고 치욕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임에는 틀림없다. 더구나 우리고장의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애정을 가지고 알고 있어야 하며 후손들도 잘 알 수 있도록 유물을 찾아 보존하고 자료를 잘 정리하여 넘겨주어야 할 책무가 있다.

우리의 근세 질곡의 역사 속에 우리고장 울산에도 빨치산의 준동과 토벌 같은 사건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크게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이데올로기가 퇴색하는 마당에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 내면에 존재하는 이념투쟁은 그들에게 남의 일처럼 느껴질 것이다.

울산지역에서 빨치산들의 활동

1945년 해방이 되었으나 타의에 의해 남북이 분할되어 신탁통치를 하는 과정에서 남측의 좌익분자들은 미군통치에 반기를 들고 파업선동 및 반정부투쟁을 하다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울산지역에서도 빨치산들이 1947년부터 신불산 파래소 폭포 위쪽 현재 전망대가 있는 곳에 대대적인 작전본부를 설치하고 후방교란 작전을 실시하여 그해 상북지서를 습격했으며 1948년에는 도동에서 주민살해를 자행했으며, 양등마을 등을 습격하여 가축과 식량을 약탈하는 등 울산서부지역에서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빨치산들의 준동에 1949년 말부터 1953년 10월까지 4년간에 걸쳐 군·경, 의용경찰이 소탕작전을 펼쳤으며 특히 1952년 2월4일부터 그해 3월6일까지 전개된 신불산 공비토벌작전은 울산경찰서가 수도사단과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치열한 전투 끝에 거의 소탕하기에 이르렀다.

유적의 보존 제안

불과 반세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이에 관련된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는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의 지인으로부터 웅촌면 오복재에 빨치산을 방어하기 위한 돌로 쌓은 호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진을 받아 울산광역시청의 담당과를 찾아가서 보존대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문화재가 아니라서 별다른 대책을 세울 수가 없다고 하며 사진을 두고 가라고 하여 맡겨두고 왔으나 몇 개월이 지나도 소식조차 없는 걸 보니 별로 기대는 하지 않고 있다.

오복재는 빨치산들의 주요 이동통로로 빨치산들이 이곳에 자주 출몰하여 차량을 탈취하여 불을 지르고 인명을 살상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며 의용경찰과 빨치산들 간에 총격전도 수차례 벌어졌던 곳이다. 이에 주민들이 의용경찰이 되어 그곳에 돌로 호를 쌓고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켰던 것이다. 돌로 쌓은 호는 허물어지면 돌무더기가 되고 쌓으신 분이 돌아가시면 그 원형조차 찾을 길이 없다.관계당국에서는 일차적으로 현장을 방문하여 보존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한 후 그 당시 호를 쌓고 근무한 생존자를 찾아 당시의 상황과 원형을 알아내어 복원하고 보존대책을 세우기를 기대한다. 여기다 통행이 가능한 길을 만들고 내용을 기재한 안내판을 세운다면 이를 보는 시민들의 이해가 훨씬 쉬울 것이다. 빨치산의 침략으로부터 내 고장을 지킨 자랑스러운 유적을 후세와 시민들을 위한 교육장으로 활용할 것을 제언한다.

이동조 전 경남은행 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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