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 25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언양현의 남쪽 15리에 있는 취서산에서 발원된 축성천이 남천과 합류되어 태화강으로 유입된다"고 쓰여있다.

 축성천은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에 있는 하천 가운데 하나다. 다른 한 갈래는 애밀천이라 했다. 축성천은 보은천을, 애밀천은 둔기천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물줄기는 대암댐에 발을 담그고 있다.

 취서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은 삼남면의 방기리를 거쳐 삼동면의 조일리로 흘러들고 정족산에 흘러내린 상금수와 만난다. 이 물은 송정·내외양·금곡·왕방 등 삼동면의 서쪽마을을 고루 적시는 8㎞의 보은천으로 대암댐에 유입된다. 작동리 우두산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둔기리에서 문수천을 만나는 하천이 둔기천이다. 역시 8㎞에 달하는 이 물은 합수나들에서 출강천을 합수하여 삼동면의 동쪽 작동들과 애밀들을 옥답으로 만든다.

 물이 풍부하고 사면이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인 삼동면(면장 차문환)은 조일리, 보은리, 금곡리, 하잠리, 출강리, 작동리, 둔기리 등 7개리 15개통으로 구성돼 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벼농사를 주업으로 삼고 있는 농촌마을로 "맑은 삼동"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울산의 휴식공간을 자처하고 있다. 주민도 울주군에서 가장 작은 727가구에 1천933명(2002년 10월31일 현재)이 살고 있다. 연령분포도 높은 편이다. 송장근 삼동면 총무계장은 "젊은 사람들이 없어서 선거권을 가진 유권자의 숫자가 전체인구의 80%를 넘어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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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동면 조일리

 삼남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조일리는 삼남면의 영향을 받아 공장이 많이 들어서 있는 암리마을과 예나 변함없이 벼농사를 주업으로 삼고 있는 농촌인 조일마을, 지랑마을 3개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조일마을과 지랑마을은 영산신씨의 집성촌으로 옛 씨족마을의 흔적으로 고스란히 지니고 살고 있는 마을이다. 400여년전인 선조 25년께 임진왜란을 피해 이주한 신추의 후손인 신진이 지랑마을에 자리를 잡으면서 현재까지 영산신씨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도 지랑은 42가구 중에 24가구, 조일은 34가구 중에 10가구가 영산신씨다. 숫적으로는 반이 안되지만 타성받이들은 대부분 음식점이나 찻집을 하기 위해, 또는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토박이들이 "마을사람"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대부분 영산신씨다. 단지 옛날에 비해 주민들의 나이가 높아졌다는 것이 달라졌을 뿐이다.

 지랑마을 신기석 이장(63)은 "환갑이 지났어도 동네에서는 "아이들"로 불리고 집밖에 나가면 담배도 못 피운다"며 "주민의 3분의 1이 70세 이상"이라고 덧붙인다.

 90세 이상 장수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현재는 91세인 이귀동할머니가 가장 나이가 많다. 신이장은 "좋은 물 덕택이 아닌가 한다"며 "지랑사람은 죽음을 앞두고 음식이 넘어가지 않아도 물만 먹고도 보름은 산다고 하는 말이 있다"고 했다.

 정족산에서 발원해 마을 사이로 흐르는 물은 주민들이 생활용수로 사용했고 식수는 산골짜기에 있던 참샘에서 길러 먹었다. 참샘에서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고 맑은 물이 나왔지만 정족산에 대규모 공원묘지가 들어서고 상류에 음식점들이 대거 들어서면서 이미 오래전에 옛말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지랑마을과 조일마을 사이로 흐르는 상금수 계곡은 여전히 비경이다. 갈라짐이 독특한 커다란 바위가 바닥을 이루어고 있어 작천정 계곡과 묘한 대비를 이루며 남성적인 활기가 느껴지는 계곡이다. 여름이면 피서객들로 몸살을 치른다고 한다.

 우리나라 어느 계곡이나 그렇듯이 서서히 음식점과 찻집들이 들어서고 있다. 하천부지를 치고 들어가 덩그러니 집을 지어 음식점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상금수의 앞날도 걱정스럽다. 그 상류에 지금은 지랑마을에 속하는 보삼(保三)마을이 있다.

 보삼마을은 영화 〈뽕〉을 촬영했던 곳으로 초가가 보존되어 있어 널어 알려진 마을이다. 보삼마을에는 초가가 겨우 2채 남아 있다. 두채 가운데 뒷집인 한채는 그나마 누군가 들어와 살고 있고 샘을 끼고 있는 앞쪽 집은 흉가에 다름 아니다. 사람이 살지 않은지 오래되었는지 마당을 말할 것도 없고 지붕 위에도 풀이 무성해서 들어설 수도 없는 지경이다. 그밖에 최근에 지은 양옥들이 들어서 있고 한켠에서는 개를 키우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벼농사에 충실하고 있는 지랑·조일마을은 그나마 삼동에서는 부촌이었다. 삼동면에는 넓은 들이 별로 없지만 지랑과 조일만은 그래도 논이 많은 편이라 예전에는 모내기 할 때면 삼남사람들을 놉을 댔다고 한다.

 신흥렬씨는 "특용작물에 별로 눈을 돌리지 않고 벼농사만 꾸준히 짓고 있다는 것이 먹고 살만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지금도 집집마다 7~20마지기씩 농사를 짓는다"고 자랑했다.

 이 마을사람들은 인물이 많다는 자랑도 빠뜨리지 않는다. 울산사람들에게 영산신씨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은 삼동면 둔기리 사람이지만 조일리에서도 박사가 5명이나 났다고 말한다. 박사가 많은 요즘 젊은 사람이 아니라 이미 50이 넘은 사람들이니 자랑할만도 하다. 영조 때 열녀각을 세울 만큼 이름난 열녀도 있었다. 배내골에서 시집온 김몽룡의 처 김해김씨로 일찍 남편을 여의고 시부모를 정성껏 보필한 뒤 시부모의 뒤를 따라 자결했다고 한다. 1955년에 복원한 열녀각이 지랑과 조일마을 사이의 도로가에 세워져 있다.

 암리마을은 조일과 지랑과는 사뭇 다르다. 조일과 지랑마을이 영산신씨들의 씨족사회인 것과는 달리 암리는 김해김씨가 터를 이루고 있다. 김해김씨 보다 먼저 들어온 창원 황씨가 7가구다. 지금도 영산신씨는 한집도 없다. 토박이들이야 여전히 농사를 짓지만 마을 전체 분위기는 공장지역이다. 삼동에서 유일하게 공장이 많은 곳으로 "맑은 삼동"을 부르짖는 삼동면에서도 예외지역인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이미 만성, 디에스아이, 중산기업, 로얄케이블, 대성산업, 유승정공, 화인텍 등 업체를 알리는 간판들이 암리마을을 알리는 표석과 함께 서있다. 삼남면 방기리와 붙어 있어 그 곳과 함께 공단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근래들어 공장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마을 입구에 학석(鶴石岩)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하며 바위암(岩)자 마을 리(里)자를 쓰는 암리마을은 한때는 조리생산지로 유명했다. 지금은 복조리라하여 설날에나 가끔 볼 수 있는 전통문화상품이 되었지만 쌀에서 돌을 걸러내야했던 옛날에는 어느 집에나 있는 주방용품이었다.

 지금은 야트막한 산을 뒤로하고 보기좋게 39가구가 늘어서 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마을이라는 이유로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지붕개량을 하면서 마을을 정비했기 때문에 시골마을 답지 않게 깔끔하게 정돈돼 있다. 햇살이 따뜻하게 퍼지는 낮시간에도 그림 같이 평화로워보인다. 마을 앞으로 회관이 자리하고 있고 한켠에는 넓은 주차장도 만들어져 있다. 정명숙기자 jms@ksilbo.co.kr 사진 김경우기자 woo@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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