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향의 긍지를 드높인 울산 3·1운동. 3·1절에 즈음하여 살신성인하신 숭고한 조상들의 행적을 더듬어 추모 감사하는 일은 오늘을 풍요롭게 살고 있는 우리 후손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라 할 것이다.

울산의 3·1운동은 석달 동안 전국 212개 시군(당시)에서 1500여회에 걸쳐 일어났던 그 어느 지역의 만세운동보다 격렬하였고 희생 또한 컸었다. 대집단을 향한 발포로 5명이 즉사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60여명이 체포되어 형사처벌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것을 잘 설명해준다.

1919년 4월초. 울산의 동(병영)서(언양)남(남창) 세 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정의롭게 살고 있던 울산인의 결집된 의지요. 응어리진 함성이었다. 일제는 우리의 숭고한 국권회복운동을 소요사건이라 비하하면서 주동 청년들을 마구 잡아가서는 고문과 태형 위주의 체벌로 일관하였다. 언양의 만세운동이 4월2일 일어났는데 4월10일에 재판언도를 했다니 20여명을 대상으로 한 졸속한 사건처리는 법절차보다 고문을 앞세웠다는 증거요, 26명의 수형자 중 10명에게 매 때리는 태형을 가했는가하면 1년 6월형을 1년 감옥, 6월분은 태형으로 바꾸어 집행했다니 이는 곧 민족멸시의 극치라 할 것이다.

이와같이 고문과 태형 그리고 이어지는 열악한 감옥생활은 혈기 왕성한 젊은 청년들에게도 치명상을 입혔다. 22명의 병영지역 수형자 중 11명이 30~40대로 해방전에 사망했으니 놈들이 행한 장독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케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는 형고를 치르고 난 애국청년들과 그 가족들에게 박해를 계속했다.

태평양전쟁 때 징용으로 표적차출되어 끌려다니다가 일본 땅에서 미군의 폭격을 받아 폭사한 분이 있는가 하면 가족(아들)이 17세 어린 나이로 징용·차출되어 남양으로 끌려가 해방 후까지 3년 간이나 인간 이하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또 계속되는 박해를 견디다못해 만주 북간도로 망명, 은둔 생활을 하다가 조국의 광복도 못본 채 이국 땅에서 쓸쓸히 묻힌 애국지사도 있었다.

해방직후의 혼란과 6·25전쟁기를 거쳐 국가가 안정되고 기틀이 잡히자 62년도부터 독립유공자에 대한 국가 포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90년도부터는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 애족장(5등급)이 추가로 시상되기도 했다. 그래서 울산의 3·1운동 수형자 62명중 40명이 국가 포상을 받아 대한민국 독립유공인물록에 등재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그 서훈은 희생자의 65%에 그치고 있다. 국가보훈처에 신청 심사중인 네 분의 수상은 물론 수상에 장애가 되고 있는 공적의 객관적 입증자료가 하루 바삐 발굴되어 희생에 대한 응분의 국가 포상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3·1정신선양사업이 여러 가지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병영에서는 학교, 도로, 건축물 따위가 애국의 대명사인 '3·1'로 이름지어지고 있는가 하면 2000년도부터는 재현행사가 개최돼 해가 거듭 될수록 중량감을 더해주고 있다.

광역시의 재정지원과 주관처의 열성적 추진에 우리 유족으로서는 감격 감사할 따름이다. 주마가편으로 이에 덧붙이고자 하는 바람은 재현 행사를 격년제로 재현행사와 문화행사로 이원화하여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애국애향 정신을 내면화하는 방향으로 선양의 효과를 극대화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하루 바삐 울산 3·1충혼탑이 건립되어 보다 현장감있는 3·1절 행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망과 새로이 조성계획되고 있는 인물공원에 울산 3·1운동 순국열사 다섯 분의 상도 함께 자리했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이춘걸 울산시 남구문화원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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