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1420~1488)이 울산에 왔을 때 태화루는 쇠락해 있었다. 서거정은 이 훌륭한 풍광이 쇠락한 것을 개탄했고, 박부경(朴復卿)이 다시 중수하였다. 이에 서거정은<太和樓>라는 현판을 쓰고'태화루 중수기'를 지었다. 후일 서거정은 태화루가 영남 3루(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그리고 태화루) 가운데 제일이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기록을 근거로 살펴보면 태화루를 세운 연대는 신라 선덕여왕(632-647 재위) 때로 추정되며, 고려 명종 때 한림학사 노봉(老奉) 김극기의 태화루 시서(詩書)에는 300여 년 동안 그윽한 경치를 노래하고 조용한 시절을 보냈다는 대목이 있다.

고려 말 민제(閔齊; 태종 이방원의 장인)가 울산을 방문했을 때 태화사는 폐허였다. 그러나 S자로 도는 물굽이 위에 깎아지른 벼랑 위인 태화루 자리에서 본 풍광은 10리 대밭에 기이한 꽃과 매화, 산다(山茶) 등의 나무가 우거져서 절경이었고, 또한 겨울에도 무성하고 향기로우니 <장춘오(藏春塢·봄을 간직한 마을)>라 했다. 멀리 삼산들과 학성 쪽도 절경이었다.

울산시는 용역보고회를 통해서, 태화들(44만2000㎡)에 대한 생태공원 조성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오는 2010년 완공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이와 병행하여 우리 울산 시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인 태화루 복원에 411억원을 들여 밀양 영남루 형태로 건축하고 종각, 조경공사, 야외공원, 편의시설 등을 조성하여 숲 산책로와 연계시키기로 하였다고 한다. 이 사업에 가장 어려움이 있었던 부지 보상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주들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복원사업을 위한 헌신적인 노고와 배려에 진심으로 머리 숙여 고마움을 전한다.

몇 년 후 나타날 그 장엄하고 훌륭한 위용(偉容), 용금소 암벽 위에 우뚝 솟아 그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며 유유히 흐르는 태화강을 굽어보면서 울산에서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이 될 태화루(太和樓)를 생각하면 가슴 벅찬 희열과 그 감동을 주체할 수 없다.

태화들에 조성될 생태공원을 뒤로 하고 태화사(太和寺) 건립 후 1400여년 이어 온 우리의 오랜 역사를 묵묵히 이야기 해 줄 태화루는 우리의 문화적 산실이자 전국적인 관광명소로서 미래 천년을 꿈꾸며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태화루의 복원은 울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자, 문화시민으로서의 자존심을 되찾는 크나 큰 사업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소실되었던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복원되면 그 가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성과로 돌아올 것이다.

태화동은 신라 때 현재의 용금소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포구가 형성되어 사포(砂浦)라고 불리던 곳이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수도를 끝내고 돌아 온 곳이 이 사포다. 사포는 태화사가 세워진 이후 태화진(太和津)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태화교가 가설되기 전까지는 강남과 강북을 긴 동아줄로 이어놓고 나룻배에서 줄을 당겨 건넜다. 이 나룻배가 절대적인 교통수단이었다. 이를 재현하여 그리 오래지 않은 우리의 생활을 소개하면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기성세대에게는 추억과 낭만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기대해본다.

밤이면 아름다운 조명을 받아 찬란하고도 수려한 경관으로 우리 울산의 밤을 수놓아 우리 전 시민들에게 정서적인 안정과 평화로움을 안겨 주고 울산 최고의 랜드마크가 될 이 사업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얼마 전 발굴된 <울산부선생안>에는 1841년, 태화루 수리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처럼 여러 자료와 고증을 면밀히 검토하고 중론을 모아서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찾은 우리의 문화유산, 장엄하고 아름답게 복원될 우리의 태화루가 앞으로 500년, 천년의 역사를 맞으면서 '바로 이 시대에 우리 전 시민의 뜻을 모아 건립되어 울산문화가 역사와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번창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우리 후손들의 칭송이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김철 태화루복원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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