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은 요즘 한창 바쁘다. 겨우살이 준비에 여념이 없다. 남자들은 일년내 지은 농사를 마무리하여 수매를 해야하고 여자들은 메주를 담그고 곧 김장준비도 해야한다.

 그래도 남자들은 수매가 끝나면 사실상 내년 봄까지 할일이 별로 없어진다. 요즘은 대부분의 농촌에서도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특용작물을 재배하기 때문에 농한기가 없다지만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보은리는 오롯이 옛날 그대로 벼농사만하는 전형적인 농촌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농한기에 들어간다.

 수매를 하고 나면 한해일을 마무리했다는 안도감에서 소줏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풀기 일쑤다. 지난 15일 수매를 끝낸 보은리 내외양마을의 이장 박창길씨(62)와 전이장 김정문씨(61) 등 4명은 마을 안에 있는 식당에서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해 살림을 정리했다.

 박이장은 "모두들 1, 2등급을 받았으니 수매는 그럭저럭 끝냈다"고 말했고 김 전이장은 "예년에 없던 특등을 만들어놓고는 특등은 하나도 안준다"고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농삿꾼으로서 정부의 농사정책에 불만이 수두룩하지만 이들은 변함없이 벼농사만 짓고 산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마을 앞 논이 그들의 생계수단인 것이다. 다행히 가구수나 식구수가 줄었으니 예전에 비해 농사가 조금 많아졌고 새마을 운동 덕택에 집들을 모두 깨끗하게 새단장했을 뿐 사람살이는 여전하다.

 그래도 마을 끝에 있는 방앗간이 옛날을 말해준다. 보은리의 원마을인 원보은마을에는 아직도 발동기를 돌려서 사용하는 방앗간이 남아 있다. 요즘은 농촌에도 각 집집마다 도정기를 두고 있어 방아를 찧으러 오는 사람도 없지만 우종구씨(66)는 "30여년 해왔던 방앗간을 없앨수가 없다"며 "우리 농사 방아나 찧는다고 두고 있는 거지"라고 말했다. 마침 지난 일요일에는 동생네의 부탁으로 모처럼 남의 곡식을 찧었다. 통통거리는 소리가 온마을을 울리고 그 소리에 맞추어 도로의 하수구를 덮어둔 판지가 덜썩거리면서 모락모락 검은 연기가 올라왔다. 내외양마을 방앗간은 그나마 전기를 사용하는 방앗간으로 고쳐져 박춘근씨가 운영하고 있다.

 남자들이 이맘때부터 농한기에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여자들은 여전히 바쁘다. 보은리에 사는 여자들은 대부분 인근 공장에 품을 팔고 있기 때문에 봄부터 가을까지 남자 못지않게 농삿일을 거들었지만 농한기라고 해서 쉴 수가 없는 것이다. 생계를 책임질 만큼 일정한 보수를 받아야 취직을 하는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들은 부업처럼 일을 시킬 수 있기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래서 보은리 여자들은 노는 사람이 없다.

 게다가 벼추수가 끝나면 곧바로 메주를 쑤고 김장을 해야 한다. 된장이나 김치는 옛날에 비해 턱없이 적게 먹지만 딸네와 아들네까지 나누어 주려면 분량이 그다지 줄어들지도 않았다.

 인근 공장의 식당에서 일하는 송위순씨(61)는 마당 한켠에 놓아둔 커다란 가마솥에 불을 때 콩을 삶으면서 "여긴 제주도야"라며 "빨리 콩 삶아놓고 공장에 밥하러 가야해"라고 말하며 종종걸음을 쳤다. "콩만 삶아놓고 내일 아침에 찧어야겠다"고 하면서도 "밤새 애가 타서 그냥 둘수가 있겠나"라고 덧붙인다. 시커먼 바가지에 콩을 한주걱 퍼담아 내밀면서 "먹어봐, 옛날에는 메주하는 날은 며느리 밥도 안준대잖아"라면서 사심없이 웃는다.

 보은리는 내외양마을과 보은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내외양마을은 위치에 따라 내양 외양으로 나누어지고 보은마을은 초계 변씨 집성촌인 송정마을과 단양 우씨 집성촌이 원보은마을로 나누어진다. 내외양마을은 큰도로를 끼고 있는 덕인지 다양한 성씨들이 모여산다.

 이들 마을은 모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골짜기에 형성된 평지에 논을 일구고 뒷산 아래로 길다랗게 집들이 들어서 있다. 그 중에도 원보은마을은 아직도 이렇게 골짜기에 마을이 있나 싶을 정도로 시골마을 그대로다. 가구수는 20가구 남짓이지만 마을 입구에 목사(牧使) 우인경을 추모하는 영모당이 들어서 있고 동몽교관조봉대부 우사곤의 효자각도 남아 있어 700여년 우씨 씨족마을의 역사를 대변한다.

 앞쪽으로 넓은 보은천이 흐르고 논이 길게 펼쳐져 있으며 2차선 도로도 뚫려 있는 내외양마을과 송정마을은 원보은마을보다는 훨씬 "새마을"이다. 특히 송정마을은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입향조의 재실인 일송재만 전통건물일 뿐 대개 집들을 근래에 새로 지어 마을이 깔끔한 느낌이다. 특히 근래들어 전원주택지로 각광을 받아 도회지 사람들이 근사한 새집을 지어 속속 들어오고 있다. 큰 공장이나 위락시설이 없는 조용한 농촌인데다 도로사정이 좋다는 것이 장점이다. 수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다는 말이 있어 더이상 오염원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전원주택지로 선호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짐작된다.

 그러나 수자원보호구역 지정문제는 보은리 주민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요즘은 마을 사람 두명만 모여도 이 이야기를 나눈다. 아직 결정이 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결론도 역시 있을 수 없고 그저 설왕설래할 뿐이지만 "재산권 행사가 어려워지는 만큼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에는 모두가 한목소리다. 정명숙기자 jms@ksilbo.co.kr 사진 김경우기자 woo@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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