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차려입은 부잣집 마나님으로 보이는 여자가 큰 소리로 "돼지어멈, 여기 물 좀 줘요"라고 말했다. 잘 생기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수더분한 한 아낙이 급하게 물을 떠다 바친다. "돼지엄마 여기 고사리 좀 더 줘요." "돼지엄마 여기 콩나물." 너도나도 돼지엄마를 부른다.

사월초파일 대구 근교의 한 사찰에서 연등달기가 한창 진행되던 중 점심공양 때가 되어 모두들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하는데, 몸빼바지에 수건을 쓴 차림으로 공양간을 들락거리며 부지런히 음식을 들인 뒤 빈 그릇을 내가고, 걸레질 행주질에 여념이 없는 여신도가 바로 돼지엄마였다.

행세께나 하는 소위 VIP 보살들과 처사들은 상좌에 앉아 공양상을 받았고, 일반 신도들도 절 행사 때마다 늘 그러하듯이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돼지엄마를 그저 마음씨 좋고 만만한 아줌마로 알며 허물없이 심부름을 시켰다. 돼지엄마 또한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 때 한 스님이 신도들의 공양을 챙긴다고 얼굴을 내밀었다. 예의 그 마나님이 기다렸다는 듯 "스님 제 등은 잘 다셨겠지요?"라고 아는 체를 했고 스님은 "아, 그럼요 법당 안 부처님 앞에 잘 달아놨습니다"라고 특별한 체를 했다. 그러자 누군가 돼지엄마에게 등은 달았느냐고 물었다. 돼지엄마는 그냥 웃으며 "나중에 달죠 뭐" 했다. 설거지와 청소를 다 끝낸 돼지엄마는 가족 이름을 정성스레 적은 등을 외진 해우소(변소) 앞에 달았다. 다들 "하필 해우소 앞이냐"고 의아해 했다. 돼지엄마는 "그냥 마땅한 자리도 없고 해서 밤에 신도님들 해우소 다니기 편하라고"라며 웃었다. 가진 것도 잘 난 것도 없는, 그저 남의 밥 심부름 물 심부름이나 하는 여인의 소박한 빈자일등이었다.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한 이십년 가까이 지난 이야기로, 당시 모 종교잡지의 기자가 사월초파일 연등행사 취재 뒷이야기로 썼던 글을 기억을 더듬어 재구성해 본 것이다. 필자는 당시 그 글을 읽고 어떤 큰 스님의 법문보다 더 큰 감동을 받았었다.

그렇다, 부처님은 부자의 큰 등과 빈자의 작은 등을 차별하지 않는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으로 다양한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신다. 그 등이 법당 안에 있든 해우소 앞에 있든 관세음보살은 다 관(觀)하신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자비의 마음이 있는 보살심을 행해야 관세음보살의 구제를 받는다. 심즉불(心卽佛)이라 하지 않던가.

이삼년 전 모 일간지 일면을 장식한 큼지막한 컬러사진을 보고 실소한 적이 있었다. 연말연시에 모 단체에서 불우이웃에게 연탄을 배달하는 사진인데 거기 나온 여사님(?)의 복장이 가관이었다. 고급 무스탕에 부츠를 신고 곱게 화장을 했는데 연탄집게라곤 평생 처음 잡은 흔적이 역력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생색내기 보살심인 것이다.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셨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3~4) 하나님은 은밀히 행하는 선행을 관하시어 갚으시고, 부처님은 굳이 돈으로 불단에 이름을 세기거나 기왓장에 이름을 쓰지 않아도 진실한 신심을 용케 관하시고 구제하신다.

사사불공(事事佛供)이면 처처불생(處處佛生)이라-하는 일마다 불공들이듯 정성을 다하면 부처님은 하처(何處)라도 나타나 그 원을 들어주신다. 단 그 정성이 진실된 것인가 아닌가를 철저하게 따지신다. 내 욕심을 위해 진실을 가장한다면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뭣하며 삼천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치인의 정치공약도 재벌의 사회헌납도 진실된 것이었으면 좋겠다.

위의 돼지엄마는 그 기자의 추적취재 결과 당시 대구 굴지의 모 재벌의 부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난타(難陀·가난하면서도 지극한 신심으로 촛불을 밝혀 부처님의 구제를 받아 빈자일등의 어원이 된 여인)의 빈자일등도 돼지엄마의 부자일등도 모두 지극한 불심이 있었으니 부처님의 가슴에 밝게 빛날 것임은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최장춘 명리학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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