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본의 보험회사에서 주부를 대상으로 집에서 버릴 것을 조사한 일이 있었다. 가구 헌옷 전자제품 등 다양한 것이 등장했는데 그 중에 빈도 순으로 10위에 남편들이 올라 있었다. 일본에서 70대를 대상으로 '노후를 누구와 보내고 싶으냐?'라는 조사를 한 적이 있다. 70대 남성 69%가 '반드시 아내와'라고 답한 반면 70대 여성 66%가 '절대 남편과 안 보내'라고 했다. '당신은 저 세상에 가서 지금 배우자를 택하겠느냐?'는 질문에도 대부분이 '아니다'라고 했다.

우리는 부부가 만나 겉으로는 몇 십년간 멀쩡한 것 같이 잘도 굴러가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부부란 서로 엇박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부부의 사연은 그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오랫동안 소화불량으로 피곤해 하던 아내가 오늘은 집안 청소를 같이 하자고 했다. 남편은 친구와의 약속을 핑계삼아 집을 나와서는 친구와 밤늦게까지 술을 먹었다. 그동안 아내에게서 몇 차례 전화가 왔지만 귀찮아 받지 않고 배터리까지 빼버렸다. 자정이 되어 집에 와보니 아내가 배를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올 때 약 좀 사오라고 전화했는데…." 아내는 아픈 것이 진정이 되자 이틀만 있으면 추석인데 친정부터 가고 싶다고 했다.

남편이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짓자 "그동안 그만큼 부려먹었으면 됐지. 당신은 당신 집에 가. 나는 우리 집 갈 테니까"라고 큰 소리를 쳤다. 추석이 되자 아내는 정말로 친정으로 가버렸다. 남편 혼자 고향으로 내려가자 시어머니는 "세상천지 이런 며느리가 어디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추석을 지내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는 집에 있었다. "당신 미쳤어. 제 정신이야?" "여보, 친정에 간 것이 아니라 병원에 입원해서 검사 받았어. 친정에 당신이 전화만 해봤어도 금방 알 수 있었을 거야. 당신이 그렇게 해주길 바랬어."

아내의 병은 위암 말기로 손을 쓸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제서야 남편은 '아내를 보내고 어떻게 살아갈까'하고 정신이 번뜩 들었다.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잔소리 하는 아내가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내 없이 살아갈 걱정이 앞섰다. 몇 달 후 아내를 떠나보내고서야 남편은 후회의 눈물만 삼키고 있었다. 남편은 여태껏 엇박자로 살아온 과거가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남편들은 30, 40대에 직장과 사회생활에 전력을 쏟는다. 아내들이 남편에 대한 기대치가 가장 높은 시기에 남편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가정이나 가족에게 쏟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이 바쁘게 살아간다. 아내들은 40이 넘으면 '나는 누구냐?'를 자문하기 시작한다. 어느 새 흰머리가 늘고 자식 키워봤자 다 품안의 자식이란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40대 여자들은 동창회나 계모임에 서서히 끌린다. 가족보다 친구가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여태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더 늙고 병들기 전에 세상구경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진다.

50대 이후부터 남성들은 가족과 가정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여태껏 돈버는 기계로 살아왔다는 회한이 들기 시작하면서 가정과 가족의 소중함이 자리 잡는다. 이 때부터 남편의 '섭섭함', 아내는 '귀찮음'이 서로의 눈에 보이는 증세도 나타난다.

부부의 일생은 엇박자이다. 여성의 삶의 화두는 사랑·가족·가정에서 친구와 사회로 번지는 반면 남성은 취업·동료·사회생활에서 가족 가정으로 옮아오는 엇갈림의 길이다. 이렇게 서로 외롭고 힘든 부부관계가 지속되는 것이다.

여성은 남편과 가정 안에서 인생의 모든 만족을 얻으려 하면 그만큼 불만이 커진다. 남편은 아내에게 다양한 인간관계와 사회활동을 집안 살림과 병행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아내 역시 남편이 가정에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 돕고 분위기도 그렇게 꾸며가야 한다. 조기퇴직 경제적 악화 등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요즘 부부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길게 보고 서로 엇갈림을 피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해야할 것이다. 며칠 지났기는 했지만 지난 21일은 부부의 날이었다.

윤정문 전 울산 강남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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