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실존주의의 대표자"
당대 대표적 존재론자 '독일의 소크라테스'로 이름 높아
실존분석 통해 존재의 의미 탐구…대표작 '존재와 시간'
후기엔 노장·화엄사상 유사…동아시아 철학자들 매료
92년 한국하이데거학회 설립 활발한 번역·학술연구도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우리 시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철학자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하이데거를 '20세기 실존주의의 대표자'로 자리매김했다.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애인으로서 현대 정치철학 분야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를 가리켜 '독일 사상계의 무관의 제왕'이라고 불렀다. 현대 독일 문학비평계의 제1인자인 발터 옌스는 그를 '독일의 소크라테스'로 규정했다.

이들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다. 사르트르, 퐁티, 푸코, 데리다 등의 프랑스 철학자들은 물론이고 가다머, 볼노우, 막스 뮐러, 마르쿠제, 한나 아렌트 등의 독일철학자들, 그리고 칼 라너, 틸리히, 불트만, 벨테, 파니카와 같은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사상가들, 루트비히 빈스방거와 메다드 보스 같은 실존주의 심리학자들 모두가 하이데거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실존철학, 현상학, 해석학, 포스트모더니즘, 실존주의신학, 실존주의심리학 등에서 하이데거의 이름은 절대적이다.

하이데거는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메스키르히에서 출생했으며, 1909년에 오스트리아 티지스 예수회에서 수사교육을 시작했으나 심장질환으로 몇 주 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 후 2년 동안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신학부에서 교회장학금으로 사제 교육을 받았으나, 천식과 심장 질환으로 인해 1911년에 전공을 철학으로 변경했다. 하이데거의 초기사상에서 가톨릭신학의 자취가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이 시기에 하이데거는 프란츠 브렌타노와 카를 브라이크를 통해 존재론에 관심을 갖게 됐고, 니체, 도스토엡스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철학, 빌헬름 딜타이의 해석학, 그리고 에트문트 후설의 현상학에 심취했다.

하이데거는 1913년에 박사논문, 1915년에 교수논문을 제출했으며, 1919년부터 후설의 조교로 일하게 됐다. 후설 교수의 부인이 하이데거를 남편의 '현상학적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후설 스스로도 "현상학, 그것은 하이데거와 나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에 매료돼 있었다. 또한 그는 후설을 통해 야스퍼스를 친구로 사귈 수 있게 됐다. 이 시기에 하이데거는 군복무와 강의와 결혼생활까지 병행하는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개신교도인 엘프리데 페트리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으며, 첫 아들을 얻은 1919년에 그는 철학적인 이유에서 가톨릭신앙을 떠나고 말았다.

1922년에 마르부르크대학교는 하이데거에게 철학 부교수직을 제안했다. 그는 이 대학에서 극히 짧은 기간 동안에 오직 강의만으로 독일과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게 된다. 여기에서 개신교의 대표적인 신학자 폴 틸리히를 만났으며, 1924년 겨울학기에는 18세의 유대인 여학생 한나 아렌트를 만나서 부적절한 관계에 빠지기도 했다. 당시 하이데거는 35세였다. 아렌트는 이듬해에 하이델베르크의 야스퍼스에게 옮겨가서 박사학위를 마쳤으며, 후일에 정치철학자로서 성공하게 된다. 아렌트가 결혼했던 1929년 직전까지 이루어졌던 약 4년 동안의 밀애가 하이데거에게 놀라운 활력을 제공한 것처럼 보인다. '존재와 시간'이 그것을 말해 준다.

1926년에 마르부르크대학교는 하이데거에게 정교수직을 수여하고자 했으나 베를린 당국은 저서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수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1927년에 후설의 주선으로 그 유명한 하이데거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이 출판된다. 미완성본이었다. 그러나 후설에게 헌정된 이 책은 하이데거를 세계적인 철학자로 급부상하게 만들었다.

'존재와 시간'은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론으로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이 책에는 세계-내-존재, 현존재, 본래성, 살핌(Sorge), 죽음에의 존재 등 그의 기본사상이 들어 있다. 하이데거는 실존적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규정한다. 여기에서 '현'(Da)이란 존재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바로 '거기'를 뜻하는 말이다. 우연적이지만 우리말 '다'의 의미 기능과 너무나 비슷하다. 우리말 '다'는 '모두'를 뜻하는 한편, 동사와 형용사의 서술어미로서 특정한 사태가 실현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 또는 실존 분석을 통해 인간은 존재의 의미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는 유일한 존재자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한 문제제기를 통해 하이데거는 그 이전의 철학자들이 존재자에만 집착함으로써 존재 자체와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는 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하이데거 이전의 철학사는 '존재망각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폰 헤르만, 소광희, 이기상, 신상희 등이 쓴 '존재와 시간' 해설서를 우리말로 읽을 수 있다.

1928년에 프라이부르크대학교는 당시 이미 은퇴한 후설의 후임으로 하이데거를 철학 석좌교수로 초빙했다. 1929년의 교수취임강연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행해졌는데, 그는 이 강연에서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서 '무'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다루었다. 그의 철학은 이미 동서사상의 권역을 넘어서고 있었다.

1930년 하이데거는 베를린대학교의 철학 석좌교수 초빙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1933년 5월1일 나치정권 아래서 프라이부르크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출된다. 그는 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게 국가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유했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서 나치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대학개혁을 추구했다. 그러나 나치정권은 하이데거의 방식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결국 1년도 안 된 1934년 4월에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에 대한 나치당의 제재와 감시가 뒤따랐으며, 1944년 5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참호공사에 투입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정화위원회로부터 교수직 박탈과 강의 금지조치를 받고서 고향 메스키르히로 돌아온다. 1951년 9월에 바덴주 교육당국이 하이데거의 복권을 선언할 때까지 그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대학 강단에 복귀한 하이데거는 1976년 5월26일 심장마비로 사망(87세)할 때까지 강의와 저술활동을 계속했다. '존재와 시간' 이후에 이미 그 단초가 마련되고 있는 하이데거의 후기사상은 노장사상이나 불교의 화엄사상과 유사성이 많아서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지역 출신의 철학자들을 매료하게 만들었다. 그의 명성은 가히 세계적이었다.

그러나 1987년에 빅토르 파리아스가 '하이데거와 나치즘'이라는 책을 프랑스에서 출판하면서, 하이데거의 과거사 문제는 데리다와 푸코가 주도하는 프랑스 지성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들 뿐만 아니라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마저도 하이데거 사상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하이데거 연구자들은 그의 나치즘 참여 성격에 대한 철학적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박찬국의 '하이데거와 나치즘'(2001)은 매우 탁월한 저작이다.

하이데거의 후기사상은 현존재 분석에서 존재 자체로의 회귀를 특징으로 한다. '존재와 시간'에서는 존재의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존재 물음을 묻고 있는 인간 현존재의 구조 분석에서 답을 얻으려고 했다. 칸트가 이성 비판을 통해 학문영역의 한계를 규정한 것처럼 그는 인간 존재의 분석을 통해 존재 의미를 포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러한 방식으로 답을 구할 수 없다고 판단해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것을 사유에서의 방향전환, 즉 '전회'(Kehre)라고 한다.

전회의 궁극적 목표는 존재 그 자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로써 그의 사상은 기독교의 신비주의로 회귀하며, 하늘의 뜻은 하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에서만 알 수 있다는 천명사상에도 통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진리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탈은폐성', 즉 '드러남'으로서의 '알레테이아'이다. 그것은 망각(레테)을 부정함으로써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진리는 존재 사건을 통해 그리고 언어 생기(生起)를 통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존재는 그 때마다의 사건 속에서 발현한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나 화엄사상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경우 존재 사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의 신비와 관련된다. 언어 속에서 존재의 신비가 드러나며, 인간은 언어의 힘 안에서 존재의 증인이 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고, 인간은 존재의 파수꾼이다.

이처럼 후기사상에서도 인간은 우주 속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간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의 신비를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것이 관건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대지적인 것 위에 서서 천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근본지평이 된다. 이 사상을 종교신학에 다시 가져간 사람은 바로 현대의 가톨릭사상가 라이문도 파니카였다. 그의 우주신인론은 하이데거의 후기 존재사상의 백미를 신학화한 것이다.

리나라에서의 하이데거연구는 1992년에 설립된 한국하이데거학회(초대회장 소광희)가 주도하고 있다. 소광희 교수는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을 1995년에 번역 소개했다. 같은 시기에 이기상 교수의 번역본도 나왔다. 그밖에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하이데거의 주요저서들로는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형이상학입문' '예술작품의 근원' '동일성과 차이' '니체와 니힐리즘'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진리의 본질에 관해' '사유란 무엇인가' '이정표' '철학 입문' '숲길' '강연과 논문' 등이 있다.

쉽게 읽을 수 있는 해설서로는 마이클 와츠, 제프 콜린스, 티모시 클라크, 윤용아, 박승억의 저서가 있으며, 보다 체계적인 정보를 원할 경우에는 오토 페겔러나 이기상의 입문서가 좋다. 예술 및 문학분야 연구서로는 폰 헤르만의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이 압권이고, 하이데거를 워즈워스(김대환)나 김수영(김유중)의 문학세계와 비교한 저술도 나왔다. 하이데거의 그리스도교신학에 대한 영향은 결정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하인리히 오트의 '사유와 존재', 존 맥쿼리의 '하이데거와 기독교', 신상희의 '하이데거와 신' 정도에 그치고 있다.

하이데거와 불교의 비교연구에서는 고형곤의 '선의 세계'(1976)가 선구적이며, 최경호와 김종욱의 연구서도 나왔다. 그러나 김형효의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 및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는 이 분야의 압권이며, 그의 논지는 김 진의 '하이데거와 불교'에서 비판적으로 정리되고 있다. 하이데거와 세미나를 같이 하고 직접 토론했던 스위스 출신의 정신분석학자 메다드 보스의 저서 '정신분석과 현존재분석'도 우리말로 읽을 수 있다.

김 진 (울산대 교수·제22차 세계철학대회 한국조직위원)

▶하이데거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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