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장자 밝혀진 고분 총 38기 명칭 '능
주인 못찾은 무덤은 '총''분'으로 불러
피장자 파악도 추정·구전 의존 불합리

유네스코가 세계 10대 문화유적지에 포함시킨 경주는 신라 천년의 문화가 지금도 숨쉬고 있는 고도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라의 역사와 문화가 이처럼 살아 숨쉬고 있는 세계적인 자연 박물관 경주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신라 역사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경주를 다녀간 후 경주에는 무덤만 있지 로마나 파리에 비해 볼 것이 없다고 투덜거린다.

신라시대는 건축물은 대부분 목재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동안 노후로 사라지고 전화로 소실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졌던 황룡사 대웅전이나 9층탑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면 이런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불평은 유럽 여행을 한 사람들이 더 심한 것 같다. 실제로 경주는 유럽의 로마나 파리에 비해 유적과 유물이 왜소하고 내용 역시 전설적인 것이 많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특히 신라 문화는 아직 땅 속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이 많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지와 문화재가 많고 또 일부는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다.

신라문화의 금자탑으로 볼 수 있는 금관만 해도 출토가 된 곳이 땅 속 무덤이고 실제로 어떤 계급의 사람들이 금관을 쓸 수 있었는지 혹은 금관이 임금이 썼던 왕관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상징적인 유물이었는지 아직 확실히 판명되지 않고 있다.

경주에는 무덤이 많다. 왕경의 중심지였던 반월성 인근에는 무덤이 즐비하고 또 서악산과 건천 인근에도 확인되지 않은 무덤들이 많다. 무덤은 내용에 따라 이름도 다르다. 따라서 신라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덤에 붙는 이름부터 알아야 한다.

경주에는 금관총·서봉총·호우총·금령총·천마총·황남대총 등 무덤에 '총'이 붙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발굴된 무덤의 유물로 볼 때 왕과 비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을 능으로 부를 확실한 증거가 없을 때 붙이는 이름이다.

경주에는 이 밖에도 아직 발굴되지 않아 유물도 없고 능이나 묘로 단정할 수 없는 무덤들이 많은데 이들을 '분(墳)'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들 분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곳을 고분군이라고 하는데 현재 경주에는 서악리 고분군과 보문고분군 그리고 금척리 고분군이 있다.

신라는 56명의 왕이 1천년 가까이 다스렸기 때문에 이중 30대 문무왕, 34대 효성왕, 37대 선덕왕 등 화장을 해 능이 없는 왕과 또 신라가 망한 후 개경에 살다가 죽어 철원에 묻힌 경순왕을 제외하더라도 50여기의 능이 경주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경주에서 능으로 비정된 것은 38기에 불과해 아직 능을 찾지 못한 왕이 16명이나 된다. 이 나마 피장자가 확실한 능은 29대 무열왕과 42대 흥덕왕릉뿐이다.

이를 성씨 별로 보면 박씨 10왕은 모두 능을 찾았고 석씨 8왕은 탈해 외에 모두 불명이다. 김씨는 38왕 중 9명의 소재를 알 수 없다.

신라의 역대 왕 중 능에 대한 소재가 기록에도 없고 전설에도 없는 왕이 몇 명 있다. 이 중에서도 중앙왕권이 확립되어 신라 비약기가 되는 18대 실성왕, 19대 눌지왕, 20대 자비왕, 21대 소지왕, 22대 지증왕 능은 아직 자료가 없어 비정할 수 없다.

따라서 역사학자들 중에는 서악산 무열왕릉 위로 있는 4개의 무덤이 아직 능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이들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비정된 능 중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 능들이 많다. 김유신 장군의 무덤은 외형이 왕릉 보다 화려해 골품제도를 중요시했던 신라시대 장군의 무덤이 왕릉 보다 화려하게 만들어진 것을 놓고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김유신 장군은 42대 흥덕왕 때가 되면 흥무왕으로 추대를 받게 된다. 따라서 현재의 무덤은 당시 다시 왕의 예우를 받아 만들어졌기 때문에 왕릉처럼 화려하게 꾸며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능의 위치를 보면 경주를 중심으로 가장 북쪽에는 흥덕왕릉이, 남쪽에는 괘릉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들 두 능은 신라 역대 왕릉 중 규모가 크고 형식이 갖추어진 대표적인 능이다. 특히 이들 능에는 문무인석이 있을 뿐 아니라 무인석 인물로 아라비아인들을 세워 놓았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신라 역사서에서 능의 소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는 것은 신라 능이 평지에서 산지로 옮겨지는 23대 법흥왕 때부터다. 그러나 이 때도 능에 대한 자세한 설명 없이 '애공사 북쪽 봉우리' 혹은 '영경사 북쪽'등 단지 당시 있었던 사찰을 중심으로 위치를 간단히 언급하고 있어 능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능은 피장자가 정해진 무덤을 말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능만 해도 무덤속의 인물을 결정지은 과정에는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현존 하는 능은 대부분 조선후기 과학적인 연구가 바탕이 되지 않은 채 김·박·석씨 후손의 문중에서 비정했다. 특히 조선 영조 이후 17기 능에 대한 피장자가 정해지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경주 향토사료를 기록한 <동경잡기>와 <동국여지승람>에도 언급이 없기 때문에 조선 숙종 때 경주 부윤을 지냈던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과 영조 때 경주출신 학자인 화계(花溪) 유의건(柳宜健)은 문중이 중심이 되어 왕릉을 비정하는 것을 놓고 비난을 많이 했다.

화계 선생은 그의 저서 <나릉진안설>에서 '사서의 기록에도 없는 천년 전의 일을 천년 후에 아는 방법은 없다. 설사 천년 전의 사람을 무덤에서 다시 불러온다 하더라도 능을 보고 어느 왕의 무덤인지 정확하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런데 하물며 무학무식한 촌부의 입을 빌려서야…'라고 써 놓아 당시 능묘에 대한 피장자를 정하면서 능 주위 촌부의 말을 참고한 것을 크게 비난하고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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