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계곡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거리(巨里)는 장수마을이자 의열의 고장이다.

 하동, 간창, 대문각단, 밤갓, 지곡 등 5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694.6"의 거리에는 144가구에 377명이 산다. 위락시설이나 공장은 물론이고 산좋고 물좋은 곳이면 으레 찾아드는 여관이나 음식점도 하나 없다. 마을 안으로 이어지는 골목은 겨우 차한대가 지날 만큼 좁고 꼬불꼬불하며 돌담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마을 한가운데로 새단장한 도로가 지나기 때문인지 마을의 분위기는 개방적이며 개량주택의 숫자도 많아서 세련된 분위기다.

 몇년전만해도 거리는 울산시내에서 65세 이상의 노인이 가장 많은 마을로 꼽혔고 100세가 넘은 장수노인도 3명이나 됐다. 지금은 100세 이상된 노인들이 모두 작고했지만 그래도 장수마을이란 명칭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70세 이상 노인이 많다.

 "아마 상북면에서 가장 오염이 안된 마을일 겁니다. 산이 높아 물이 유난히 맑습니다. 상북면에도 위락시설이나 공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오염된 곳이 많지만 우리 마을은 옛 농촌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죠."

 거리 이장인 이종옥씨(60)는 거리가 장수마을인 이유를 이렇게 꼽았지만 류천선씨(74)는 "산높고 물맑은 이천리에는 장수하는 노인이 별로 없는 걸 보면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의문을 덧붙였다.

 그러나 거리가 다른 마을에 비해 특별하다할만한 다른 것은 별로 없다. 오히려 바람이 몹시 심해 겨울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해 의아심을 더할 뿐이다.

 박상록씨(75)는 "바로 산아래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바람이 회오리를 치며 분다"며 "옛날에는 지붕이 날아가기도 하고 마당에 펴놓은 평상이 넘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상북면은 바람이 세기로 유명하지만 그 중에서도 거리는 유별나다. 거리는 1천미터 넘는 신불산과 800미터 가량되는 오두산을 서쪽에 두고 있다.

 상북면의 어느 시골마을이나 마찬가지로 거리의 주민은 노인들이 주를 이루며 논농사를 짓지만 위락시설이나 공장이 없는 것에 비해서는 젊은 사람들도 많다. 30~40대로 구성된 청년회와 부녀회의 회원이 20여명에 이른다.

 마을회관 앞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서미숙씨(37)는 "어른 모시고 사는 젊은 부부가 많다"며 "벼농사도 짓고, 비닐하우스로 채소농사도 짓고, 단감농장도 하고, 농공단지 등 회사도 다닌다"고 말했다.

 상북면에서 밭이 가장 많은 마을이라는 것이 젊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이유가 되는 지 짐작해볼 뿐이다. 예전에 종이를 만들었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지곡마을 앞으로 닥밭실이라는 닥나무를 재배하던 밭이 있었는데 그것이 일제 때는 목화밭으로, 근래들어서는 일부 논으로 개량되고 채소를 재배하는 밭으로도 남아 있다. 벼농사를 최고로 쳤던 옛날과는 달리 근래들어 다양한 작물재배가 가능한 밭이 젊은 사람들에게는 더 유용하기 마련이다.

 거리는 저수지와 농로가 예부터 발달됐고 들도 넓었다. 그래서 풍요로운 마을이었던 것은 마을 이름의 유래를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된다. 간창에는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곡식을 저장해두던 창고가 있었고 대문각단에는 구씨와 오씨성을 가진 부잣집이 있었는데 호화로운 대문을 달고 있었다 한다. 마을 한가운데 흐르는 간창천 등 풍부한 물도 이 마을을 비옥하게 하는데 적잖은 역할을 했겠지만 1928년에 이미 저수지를 만들어 천수답이 아닌, 수리안전답으로 수확을 보장받은 곳이기도 했다. 하동마을 느티나무 아래 서있는 안골못방축기념비는 저수지가 농사에 얼마나 큰 보탬이 됐는지를 설명해주는 자료다.잡았다.

 간창마을에는 영사재라는 오래된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다. 간창은 문화류씨의 집성촌으로 영사재는 문중 재실이다. 16대 종손인 류제한씨(72)는 "그가 어릴 때는 35가구 가운데 다른 성씨는 5가구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28가구 중에 8가구만 집안"이라고 말했다.

 오두산 아래 자리한 지곡마을은 최근 전원주택단지로 인기를 얻어 10여가구가 들어섰다. 이 일대에서 가장 좋은 물이 흐른다는 지곡(또는 지시골)이 있기 때문이다. 부산·울산에 살던 이들이 아예 들어와 살기도 하지만 주말에만 들리기도 하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과 어울려 지내지는 않는다.

 거리는 양등리에서 새로 난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바로 아래마을이다. 그 아래로는 옛 상북면의 소재지였던 길천리와 잇닿고 현재 면사무소가 있는 산전리와는 태화강으로 내려가는 하천을 사이에 두고 지척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길이 없어졌지만 옛날에 마을 뒤로 난 산길을 넘어 이천리로 가곤 했다.

 면소재지와 바로 붙어 있었던 점 때문인지 거리는 일찌기 천도교가 전래돼 마을주민들의 의식을 일깨웠다. 조선 후기(1860년) 최제우를 교조로 하는 동학이 1905년 제3대 교조 손병희에 이르러 개칭한 천도교가 거리에 전파돼 1897년부터 천도교 울산교구가 설치됐다고 현재 편집 중인 상북면지는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손병희에 의한 천도교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거리에 동학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때 거리의 20여가구가 천도교인이었다.

 초대교구장은 최해규씨가 맡았고 1913년에 거리 하동마을에 교구실을 세웠다. 이들은 인내천 사상을 널리 퍼뜨려 나가면서 독립운동을 함께 전개했다. 최해규씨에 이어 교구장을 맡은 김교경씨를 비롯해 이규장 이규로 이규천 이무종 최해선 곽해진 유철순씨 등이 앞장섰고 교인들은 성금을 내놓으며 이를 지지했다.

 독립운동과 함께 이들은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민족교육이 절실함을 실감하고 1922년 교구실 옆에 양정학원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근대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현재는 그 흔적이 느티나무 아래 유허비로 남아 전해지고 교구실은 하동마을 안으로 옮겨졌다.

 천도교인인 이경문씨(65)는 "5년여전에 102세의 나이로 작고한 종조부 이종능씨가 교구장을 맡아 있을 때만 해도 매일 일요일마다 모임이 계속됐으나 지금은 교구실이 빈집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천도교 울산교구의 자리마저 울산에 내어주고 이들 교구는 언양교구로 바뀌어 울주군 삼남면 교동에 교구실을 두고 있다. 정명숙기자 jms@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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