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은 전통적인 충의의 고장이다.

그 역사적 사례를 들어보면 아득히 1600여년 전 신라 충신 박제상은 울산 해양집단의 도움으로 국난을 슬기롭게 수습했다. 400여년 전 임진왜란 때는 '울산의 창의 의사가 아니었던들 나라의 남쪽을 잃은 지 오래 였으리라'고 한 선조대왕의 유시(諭示)가 있다.

그리고 국권회복을 절규한 3·1 만세운동 등 이 땅에 살다 간 우리 조상의 국난극복 호국의 역사는 찬연히 빛나고 있다.

6·25가 터진 지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되자 부산으로 임시수도가 옮겨졌고 울산과 부산은 반격의 거점이 됐다.

당시 울산의 도심을 가로지르는 24번 국도는 남하하는 피난민과 북진하는 군용차로 흙먼지가 가라앉을 틈조차 없었다.

대부분의 학교들은 육군병원으로 징발돼 운동장엔 구급차로 가득찼으며 거리는 걸음 바쁜 군인들로 넘쳐났다. 급기야 영천 안강 포항으로 전선이 형성되면서 우리 울산을 압박했다.

그 옛날 우리의 조상들이 그러했듯이 울산의 의혈청년들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잽싸게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농민도 학생도 모두 그랬다.

미처 총알을 장전할 방법도 익히지 못한 채 부랴부랴 전선으로 내달았다.

그래서 기어이 침략자를 물리치고 고장을 지켜냈다. 울산대공원 현충탑에 모셔진 3500의 숭고한 영령들이 우리 울산의 충의 향의 전통을 잇기 위해 희상하신 것이다.

살아남은 6·25 전사들은 전쟁이 끝나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전쟁 중에 발휘한 불효불굴의 정신과 초극(超克)의 단결심으로 국가재건사업, 나아가 산업수도 건설의 역군으로 마지막 젊음을 바쳤다.

1996년도에 대통령은 참전용사 증서에서 '귀하는 6·25 전쟁시 참전하여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국가 발전에 헌신하였으므로 그 명예를 선양하기 위해 이 증서를 드립니다'라고 했다.

2008년 3월 대통령은 이에 덧붙여 "참전용사 여러분은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 몸을 바쳤고 폐허의 땅에 산업화와 민주화의 역사를 이루어 냈다"면서 "새로운 정부는 확고한 국가관을 바탕으로 참전용사 여러분의 보훈과 복지향상에 더욱 힘쓸 것"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취해진 조치는 법개정으로 6·25 참전유공자를 국가유공자로 격상 예우한 것이다. 우리 6·25 참전자로서는 국가의 선양조치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6·25가 있은 지 58년이 흘렀다.

패기 넘치던 20대 청년이 70~80대의 등허리 굽은 노인이 됐다. 쉬엄쉬엄 마을 언덕에 올라 바라본 고향산천과 110만의 거대한 광역대도시, 이 엄청난 발전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지난날 우리가 한 희생이 값진 거름이 되어 오늘의 영광된 고장으로 꽃피웠으니 어찌 감격하지 않으랴.

우리의 달 6월이 왔다.

몇 번 남지 않은 또 한 번의 6월을 맞아 나라에서 기려준 크나큰 명예에 우리는 자중자애해야 할 것이다.

이춘걸 6·25 참전 국가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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