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 솟은 설산 아래 숨겨진 여유로운 휴양도시
눈가에 미소 깃든 주민들…장수마을로도 유명
해발 3000m 언덕서 바라본 일몰 잔잔한 감동

여행자들은 파키스탄의 훈자를 블랙홀이라 이른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도 게스트하우스에는 박쥐처럼 웅크린 여행자들이 많았다. 여러 달을 넘기고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머무름의 유혹에 넘어 간 것이다. 나 또한 자칫하면 그 블랙홀에 빠질 것만 같았다.

훈자는 멀고도 먼 길이었다. 라호르에서 출발하여 거의 28시간을 버스를 탔다. 더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그 더위 속에서 버스의 타이어가 여러 번 펑크 나는 바람에 더 더딘 행보였다. 아니 우린 엄청 운이 좋았다. 폭우라도 내리면 길이 없어 며칠씩 갇히기도 한다는데 28시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밤중에 도착한 훈자는 수많은 별이 우리를 맞았다. 주먹만한 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우리가 묵은 작은 호텔 세리나. 그곳에서 눈을 떴을 때 그냥 입을 벌린 채 다물지를 못했다. 우뚝 솟은 설산들, 그 아래 점점이 박힌 집과 나무들, 그러고 보니 지난밤 주먹만 하던 별은 언덕에 있는 집의 불빛이었다.

훈자는 해발 2500m의 산악도시다. 물길을 따라 버드나무와 포플러가 줄지어 서 있고 집들은 나지막하게 산자락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연일 무더위와 싸우고 길 위에서 지쳤던 우리에게 훈자는 지상낙원이었다. 휴양도시답게 날씨는 속이 시리게 선선했고 풍광은 뛰어났으며 사람들은 친절하고 순박했다.

종일 훈자마을을 다녔다. 느릿하고 편안하게, 우아하고 기분 좋게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며 이집 저 집을 기웃거렸다. 집집마다 작은 마당에는 살구나무가 담장 밖으로 가지를 뻗어 서 있고 가축을 키우는 소박한 농촌 마을이었다. 아이들은 예뻤고 어른들은 부지런했으며 소녀들은 말을 걸면 수줍어하다가 이내 깔깔거렸다. 소년들은 의젓하고 노인들은 당당했다.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살아가는 그들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을에서 만난 노인은 훈자도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한다. 카라코람 하이웨이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욕심이 생겼고 관광객이 드나들면서 돈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길이 뚫리기 전에는 100살을 훨씬 넘겨 장수 했는데 이제 외부의 것들을 받아들여 먹고 살다보니 수명이 줄어 100살까지 밖에 못 산다고 하니 관광객인 나는 정말 미안했다. 우리도 여지없이 이 낙원을 편의주의로 물들게 하는 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발티트 마을의 제일 높은 곳에는 훈자왕국시대에 왕이 살던 발티트성이 있다. 티베트 공주가 시집 올 때 건립되었다는 이 성은 티베트 불교 사원과 건축양식이 비슷했다. 성안은 그리 넓지 않았다. 그러나 다양한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 폴로 경기를 구경하는 전망 좋은 방이 마음에 들었다. 알티트 마을에도 알티트 성이 있는데 복원 공사 중이라 관람을 할 수 없었다.

해가 질 무렵, 해발 3000m의 이글 네스트 선 라이즈 언덕에 올라 일몰을 감상했다. 그곳에선 카라코람 산맥의 멋진 봉우리들을 감상 할 수 있었다. 우람한 산맥이 주는 성스러움에 인간의 존재감이 자꾸 미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7000m 넘는 산들이 만년설을 이고 도도히 석양을 머금어 빛날 때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깨달았다.

훈자로 오던 길에 '샹그릴라'라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파키스탄 지도에도 나와 있는 샹그릴라 사진이 조그맣게 레스토랑 벽에 걸려있었다. 그 레스토랑에서 제법 먼 곳에 있다는 샹그릴라는 넓은 호수와 설산, 그리고 숲과 집들이 멋진 조화를 이룬 곳이었다.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정말 샹그릴라가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샹그릴라는 1933년에 출간된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이상향으로 묘사된 곳이다. 머나먼 동방의 땅, 산이 중첩된 준령가운데 위치한 땅이라 했다. 영원한 평화와 평정의 땅, 지상낙원이요, 이상향인 샹그릴라를 찾기 위해 사람들은 히말라야 아래를 헤맸다.

그런데 중국에서 2002년 윈난성 서북부에 위치한 중띠엔을 '샹그릴라'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마을의 이름도 샹그릴라로 지명을 변경하였다. 지금 중국의 샹그릴라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관광산업이 날로 번창해 상업화가 되어버린 그곳은 '잃어버린 낙원'이 될 위기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찾아 헤매는 낙원은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른다.

살인적인 무더위에 지쳐 찾아든 나에게 훈자는 진정한 샹그릴라요 평정의 땅이었다. 그 옛날, 대상들도 길을 가다 훈자에 들러 몸과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고 푹,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떠남이 아니라 머무름을 가르쳐 주는 곳이 훈자다.

배 혜 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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