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봉정암 가는 길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고,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마음의 길'이라고 했다. 또 봉정암 가는 길에는 '길(道)'이 있다고 했다.

팔순이 지척인 어머니를 모시고 4월 초파일 봉정암 순례를 계획했던 것은 확실히 무모한 도전이었다. 울산에서 백담사까지 승용차로 6시간, 백담사에서 다시 건강한 어른의 걸음으로 5시간은 산행해야 갈 수 있는 곳이 봉정암이다.

누군가 봉정암 가는 길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고,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마음의 길'이라고 했다. 또 봉정암 가는 길에는 '길(道)'이 있다고 했다. 그랬다. 지천으로 깔리고 덮힌 초록빛 작은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얻기에는 충분하였고, 도(道)를 느끼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수다를 떨며 흘러가는 계곡이 얼마나 살가운지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답다. 간간히 만나는 소(沼)는 속살 환히 내놓은 옥빛 거울 그대로이다. 하늘 찌를 듯이 높은 산은 높은 산대로 흐르는 물은 흐르는 물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바위는 바위대로 봉정암 가는 길은 자연 그대로의 길이고, 자연과 하나 되는 길이었다.

어머니는 간혹 발이 저리다고는 하셨지만 생각보다 잘 걸으셨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대단하시다는 위로와 함께 무사히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건넨다. 어머니의 정정함이 무엇보다 기쁘고 고마웠다.

드디어 봉정암! 백담사를 떠난 지 7시간만이다. 위로는 투명한 하늘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졌고 아래로는 내설악과 외설악의 능선이 암벽과 녹음으로 어우러져 딴 세상을 느끼게 했다. 이렇게 깊고도 높은 산 중에 누가 무슨 생각으로 석탑을 쌓고 암자를 지을 생각을 했을까.

지혜전 4호실. 장정 네댓 명이 묵을 만한 아늑한 곳이었다. 그랬다. 적어도 그때까지만 해도 문을 열면 왼쪽으로 '봉정암'이라는 대웅전의 편액이 보이고 설악산 자락이 그림처럼 펼쳐진 곳으로 그냥 앉아만 있어도 도가 닦여지고 깨달음이 얻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느긋함은 한 마당 봄꿈이었음을 해가 진 뒤에야 알 수 있었다.

낮의 그 아늑한 자리는 밤이 되면서 무려 22명 남자들의 잠자리가 되어 몸하나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자리를 비집고 누웠지만 말이 그렇지 완벽한 칼잠이었다. 손과 발이 엎치고 겹쳐 누구 발인지 누구 손인지 꼼짝없이 몸 한 번 비틀지 못하고 있어야 하는데 코고는 소리에 방귀 소리, 거기에 땀으로 찌든 온갖 냄새로 이미 그곳은 잠자리라기보다는 피난처였다. 밤새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박명(薄明)이 느껴지자 주섬주섬 물건을 챙겨 문을 나섰다. 멀리 사리탑이 있는 능선에는 밤을 새워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다가선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저리도 고통을 감내하며 끊임없이 몸을 던지는지. 가늠할 수 없는 믿음의 깊이를 느끼게 했다. 어둠이 걷히면서 설악산의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어제 일몰 전에 그림자가 어렸던 산정의 긴 암벽에는 아침 햇살이 비쳐들면서 영롱한 빛으로 반짝였고, 굽은 듯 휘어드는 능선은 어두운 옷을 벗고 녹색 빛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거기에 안개 구름은 봉우리를 휘감아 돌며 먼 구름과 어울려 멋진 아침 교향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런 장관이 또 있을까 싶었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함께 앞으로 산을 사랑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양 길에 만난 어머니는 밤새 편하게 잠을 잘 주무셨고, 날씨도 아주 좋아 다행이라고 말씀하신다. 무어 그리 편안한 잠을 주무셨을까 싶지만 밝은 얼굴에 마음만은 그러하셨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지 잠 한숨 자지 못한 나도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침 공양을 마치자마자 하산을 서두른다. 올랐으니 내려가야 하는 것이 삶의 이치. 갑자기 백담사에서 보았던 고은의 시 구절이 생각난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삶의 이치와 인생의 진리를 이리도 멋지게 간파한 말이 있을까 싶다. 시가 가진 촌철살인의 멋이다. 나도 힘들게 오르며 보지 못한 그 무엇을 내려가는 길에는 볼 수 있을지….

봉정암 가는 길은 이렇게 기막힌 추억으로 막을 내리고 있었다.

허석도 수필가 현대청운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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